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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일(2004-06-03 12:01:48, Hit : 3096, Vote : 614
 (2)우리와 같으신 예수


고난을 통하여 온전케 하심
히브리서 2:5-18                   (2004. 5. 12 수요일)  
   히브리서 1장을 지난주에 살펴보았는데 1장의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1-3) 그리고 천사보다 뛰어난 예수님(5-18)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주제는 전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전반부에서 나타내고 있다.
   히브리서는 고난과 시련으로 절망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바라보자고 권면을 한다. 마치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 가운데 하나님조차도 부재하시고 침묵하시는 것으로 그려져 있어서 약속을 받지 못한 채 죽어 가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야 한다. 그러나 이런 박해의 상황 가운데서 히브리서는 결코 우리가 홀로 버려있지 않으며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고난가운데 있는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제시되고 있다. 인간으로 오셔서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모든 일에 우리와 동일시하시고, 우리를 형제와 자매로 부르시고 우리를 자녀로 여기시며 우리를 품어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의 구원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말씀이 2장 전체에 흐르는 말씀이다. 1장의 분위기와 2장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1장 1절부터 예수님의 선재성, 만유의 후사이며 창조주이시고 능력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신 그 아들을 통하여 자신의 계시를 완성하셨다고 선포한다. 특별히 그는 “죄를 정결케 하시는”능력을 가지신 분인데 물론 우리가 대 제사장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1:3) 5장에도 연결해서 말씀하고 있다. 레위의 제사장직과 아들의 대 제사장직을 비교해서 아론의 제사장직의 불완전성에 대해서 비교해 가면서 아들의 대제사장직의 완성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
   2장에서는 어려움(고난)에 처한 독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다시 한번 주의하여 숙고하도록 그리고 예수에 의해 전해진 말씀(복음)을 등한히 여기는 것이 얼마다 큰 잘못인지를 알게 하려고 한다. 예수 바로 알자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실의에 빠져있는 청중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대면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절망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부재하시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 고민하는 청중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일깨우고 있다.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시고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시고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주의 깊게 상고하고 큰 구원을 무시하지 말라고 권면을 한다.
   2 장에서만 예수님이 우리와 동일하게 고난을 받으신 분으로 말씀하고 있지만 히브리서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예수님은 그 무엇보다 뛰어나다고 말씀하고 있다. 지난주에 말씀한 것처럼 1장에서는 천사보다 뛰어난 분 (1:14), 3장 4-5절에 보면 모세보다 뛰어난 예수님, 모세는 사환이다. 그 집에서 일하는 일군이다. 창조를 한 신이 아니다. 창조된 세계에서 일하는 일군에 불과하고 4장에 보면 8-9절에 여호수아 보다 뛰어난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었지만 그 뒤에 다른 날들이 있어서 불완전한 안식을 누리게 했지만 예수님은 완전한 안식에 누리게 하셨다. 9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아론 제사장 보다 뛰어나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단번에 이루었기 때문이다.(9:11-12) 그리스도께서 율법보다 뛰어나신 이유는 그리스도가 더 나은 언약을 세우셨기 때문이다.(8:6)
   이렇게 뛰어난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당함으로 인해 얻어지는 것이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알면 고난도 감수한다.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면 어려움도 함께 극복을 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면 좋은것도 함께 누리지 못한다.
   사랑하면 모든 것을 함께 한다. 오늘 고난의 문제를 다루는 것도 예수님이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고난을 당하신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성경에 보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가정이 이루어진다. 요셉과 마리아의 이야기이다. 요셉은 어느날 자신의 정혼자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다. 아직 정혼을 했지만 동침한 적이 없는데 임신을 했다면 뻔한 이야기이다. 요셉이 나쁜 놈이라면 당장에 동네 한 마당에 마리아를 세워 놓고 공개 재판을 통해서 마리아를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용히 해결을 하려고 한다. 그날밤 요셉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난다. 천사를 통해서 요셉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을 알았다. 이런 어마 어마한 사건 앞에서 요셉은 마리아를 떠나지 않는다. 에전에도 한번 말씀 드린적이 있다. 어떤 성경공부 모임에서 어떤 사람이 어떻게 처녀가 임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서 물어 늘어졌다. 그때 옆에 있던 어떤 사람이 아니 제 서방이 믿는다는데 왜 네가 난리야 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다 못 믿어도 요셉은 마리아를 믿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하는 것이고 마리아를 보호 한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사랑하지 않으면 등을 보인다. 사랑을 가장한 믿음을 갖지 말자.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를 보면 귀족 출신인 여성은 구조선을 타고 도망 칠 수 있었지만 애인이 구명 보트를 타지 않고 침몰하는 배에 남자 주인공과 함께 한다. 구명 보트를 타지못한 남자친구를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타이타닉의 주인공은 배가 순조 롭게 그들의 항해 할때 그들의 사랑이 빛난 것이 아니라 배가 침몰하는 상황 가운데 더욱 빛이 났다. 위기가 다가오면 핍박이 다가오면 우리의 사랑과 믿음이 어떤지 알 수 있다. 사랑하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떠나면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떠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면 죽을 때까지 함께 하는 것이다.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자는 연대감을 갖자는 말씀이 오늘 말씀의 주요한 주제이다.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런데 깨닫는 것은 가슴으로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사랑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면 예수님의 고난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아는 것 만큼 본다. 지난번 캄보디아의 앙코르 왓이라는 곳에 갔다. 나는 조금 캄보디아를 공부하고 갔는데 그래도 보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그 왕코르 왓의 유적에 대한 것을 공부하고 가면 공부하지 못한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왜 다른 문들은 다 동쪽으로 문을 내었는데 이 사원은 서쪽으로 문으로 내었는지 뭐 이런것들이 눈에 들어 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깊이 알면 알수록 예수를 더욱 사랑 할 수 있다. "사랑하세요 사랑한 것 만큼 보입니다." 라는 말이 있다.
   우리 아이가 요즘에는 파충류에 푹 빠져 있다. 그래서 파사모 클럽이라는 카페까지 만들어서 운영을 한다. 파충류의 종류를 100여가지 정도를 거의 이름을 안다. 그 파충류의 특성이라든가? 무엇을 먹고 사는지 야행성인지 주행성인지? 어디에 사는지? 사육에 대한 정보등...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이 알고 있다. 만일 우리가 성지 순례를 간다고 하면 공부하고 간 사람하고 공부하지 않고 간 사람하고는 보고 오는 것이 다를 수 있다. 사랑하면 그 사람이 믿어지는 것이고 그 사람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기록자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기는 것은 신앙을 포기해야 하는 위험에 처한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충분한 내적 힘이 생기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신들이 겪는 극심한 어려움과 핍박하는 주위사람들에게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고자 했다. (3장1절/12:2) 그들로 하여금 이 위험한 시기에 더욱더 믿음 안에 굳게 서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상기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사랑하면 예수만 보인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피가 튀면서 채찍을 맞으시고 우리처럼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죄 없으신 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만 보인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12장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 바라보자고 권면을 한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믿음에 대한 정의가 무엇인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보지 못한것들을 믿으면서 확신가운데 사는 것이라고 한다. 비가 온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산에다가 방주를 짓는 것, 약속의 땅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며 요셉은 뼈를 가지고 가라고 했다. 이 사람들이 본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본 듯이 살았다. 결국 믿지 못하는 것은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이다. 믿음이 없으면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 아니 다른 소리로 들어서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다.
  1장에서 ‘아들이 천사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다. 아들이 우주의 최고의 자리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않으실 분으로서 ‘영광의 광채’이시며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3절 참조). 그런데 2장에서는 이 아들은 우리의 구원의 주가 되시기 위해 천사보다 못하게 되신 고난의 주님이시다라고 말씀을 하면서 고난을 받으시는 아들로서 철저하게 인간 예수님으로 다시 소개되고 있다.
   2장 처음 부분부터 경고의 말씀이 주어진다. 들은바를 더욱 굳게 간직하여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구원의 메시지를 시편 8편에 있는 인용을 통해서 확증한다. 천사가 사람보다 낫다고 할지라도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이 다스리는 세상은 아니다.
    다시 그래서 5절부터 그리스도와 천사에 대한 토론을 한다. 사람이 무엇인가? 이 질문은 창세기에 이미 주어지고 있다. 사람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모든 만물들을 다스리라는 책임성도 주셨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육체로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영과 혼이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주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생령이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인간은 영혼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말한다. 개를 만들고 너는 나의 형상이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모든 행동에 책임이 뒤따른 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주는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 하셨다. 인간의 막중한 책임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이 누려야 하는 당연한 권리이지만 이것은 또한 막중한 의무이기도 하다. 관리자로서 인간은 최선을 다해서 다스려야 한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사명이다.
시편 8편 4절에 보면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씀 하셨다.
    섹스피어 역시 "하나님이 만든 만물 가운데 최고의 영광스런 존재, 걸작은 사람이다."라고 말을 했다. 재대로 본 것 같다.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이다. 그런데 사람이 걸작품이라고 했다. 그런데 돼지같이 살면 돼지하고 친구가 되는 것이고 개같이 놀면 개하고 친구인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존재가 아 내가 사람이지 하고 깨닫는 순간 사람이 되는 것이지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밖에 될 수 없는 것이다.
   탕자가 아버지를 졸라서 아버지 내가 밖에 나가서 성공하고 돌아 올테니 자본 좀 대주십시오 라고 말을 했을 때 거의 멸망하는 짐승이다. 그래서 돼지하고 친구하면서 쥐엄 열매 가지고 돼지하고 싸우니까 이때 아마도 생각하기를 내가 돼지하고 먹을 것 가지고 다투어야 하는가? 나는 돼지가 아니라 사람인데...
  요즘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하나님이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노아의 시대와 같이 하나님이 사람 만든 것을 후회하시고 탄식하신다면 얼마나 불쌍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인가?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만들어 져서 작품으로 살아야 하는데 작품 보다는 상품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늘 비교하면서 아주 슬픈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안에서 가치 있는 존재들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 가야 한다. 우리의 가치가 주님의 성품을 닮아갈 때 최고에 이른다.
  그러나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절부터 보면 고난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아들이 고난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고 이 편지를 읽고 있는 1세기 기독교인들 역시 실제로 핍박과 죽음을 두려워 하고 있는데 왜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셔야만 했는지 또 고난 가운데 시험을 받으셔야만 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10절에 그 분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합당하고 아들의 고난은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는 우리와 연대감을 갖는 것을 강조 하고 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11절)
    그들의 구원을 위한 그의 성육하심과 고난받으심으로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이 구원은 저자가 앞으로 다룰 그의 제사장직(priesthood)과 희생(sacrifice)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17-18절).
    결론적으로 히 1:5-2:18은 아들의 [천사보다] 뛰어나심(탁월성)에 대한 선언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아들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사보다 못하게 되심(성육하심: 고난과 죽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나아간다. 결국 1-2장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환난가운데 있는 자신의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금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고 계시는 분이심을 발견한다. 그리고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받으시고 죽으신 분이시다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한 그는 우리의 어려움을 아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특히 성육하심을 통해 범사에 우리와 같이 되시고(고난을 받으시고), 또한 십자가상에서 죽음의 고난을 경험하심으로써 그 아들은 긍휼하심(compassion)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의 사역을 잘 봉사할 수 있는 자비로우신 대제사장이 되셨다. 결과적으로 자비롭고 충성스러운 대제사장으로서 그는 시험 당하는 우리를 능히 도울 수 있는 분이시다. 시편 8:4-6의 말씀처럼, 정말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는 시인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큰 감동으로 찾아온다. 사람이 천사보다 꽃보다 아름답다.
    예수님도 우리처럼 고난 당하셨다. 그는 우리를 형제처럼 사랑하신다는 예수님과 우리의 연대감과 동일성을 느끼게 해 주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제 십자가를 지시고 부끄러움을 참으시며 고난받으신 예수님 늘 생각하면서 구원의 길에서 물러나지 않고 핍박 가운데서도 믿음안에 굳게 서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3)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1)천사보다 뛰어난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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