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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일(2019-04-18 14:48:01, Hit : 11, Vote : 0
 2019.4-2 그 형제들이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그 형제들이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요한 7장 1-9                             (2019. 4. 14 속회)
사도신경               찬송 151장          기도
   오병이어 사건 후에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웠는데 유대 사람들은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그런데 예수님은 명절이 되어도 갈릴리에서 계셨고 유대 예루살렘으로 가시지 않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께 와서 말하기를 “당신이 행하는 일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유대로 가소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기적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예수님은 형제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때가 이르지 아니했다 세상이 나를 미워하고 악한 일로 증언한다.” 이 말씀을 하시고 명절에 올라가지 않으셨다.
    예루살렘은 수도이면서 종교의 중심지이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 40년동안 초막을 지고 고생하면서 살았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온 식구들이 광야로 가서 천막치고 뜨거운 태양 아래서 일주일을 생활하는 것이다. 물론 7장에 예수님이 결국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지만 아직 올라가지 않으실 때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께 와서 ‘엄청난 표적을 행하셨는데 이렇게 갈릴리 춘 구석에서 활동하지 말고 사람이 많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람ㄷㄹ이 깜짝 놀랄 기적을 행해보세요’라고 말을 한 것이다.
   이렇게 제안한 그들을 성경은 이렇게 평가한다. “이는 그 형제들이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의 형제들로는 야고보 요셉 시몬 등이 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하는데 예수님의 형제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님의 형제들도 예수님이 능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큰 물에서 기적을 행해보라고 한 것이다. 능력이 있음을 인정했는데 왜 성경의 평가는 믿지 않았다고 했을까? ‘도대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약 2장 19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드니라” 귀신도 하나님의 능력과 존재를 믿었다. 그것을 믿었다고 귀신이 믿음이 좋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귀신들린 사람도 영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은 알아본다.
   ‘능력을 보여 주세여’ 할 때 예수님은 ‘때가 차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때라는 것은 십자가의 때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십자가 중심의 믿음이다. 우리의 욕망이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다.
   초막절이 가까워오니까 예루살렘에 수십 만명이 몰렸을 것이다. 갈릴리 호수가에서 오천명 앞에서 기적을 일을 킨 것 보다는 수십만명 앞에서 이런 기적이 일어나면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사람이 기대하는 예수님은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으로만 생각을 한 것이다. 배고픈 사람에게 빵 주고 아픈 사람 고쳐 주고...이러한 사실을 믿고 있었으면 이것으로 충분한 것 아닌가?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는 안 믿었다고 말을 하고 있다.
   자기들의 친형이지만 메시야로 믿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한 메시야는 다윗과 같은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였다. 이제 남은 것은 시기와 방법의 문제였다. 언젠가는 분명히 유대를 회복할 터있데 그때가 빨리 오기를 바랬다. 그래서 그들은 그 시기를 명절인 초막절로 잡고 예루살렘에서 한번 능력을 보여 주시자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형제들의 생각은 예수님을 유대나라의 왕으로 만들겠다는 의도 이지만 또 하나의 의도는 형님이 왕으로 출세하면 덕분에 형제들도 덕을 보자는 이기적인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욕심과 질투가 분쟁을 일으킨다. 자리를 탐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움과 고난에 처하면 자신의 비참한 위치에 초점을 맞춘다. 부르짖는 내용도 험악한 곳에서 건져달라는 기도가 대부분이다. 기도는 간절한데 내용은 위치 변화에 대한 부르짖음이다.
   바른 양육은 성도의 상황과는 별개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바닥이면 어떤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라면 그것이 부흥이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위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두려움이 없다는 고백이다. 위치가 아닌 관계의 확신이 있는 다윗의 고백이다. 성도는 바닥이나 정상 어디에도 놓일 수 있다. 위치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관계로 판단해야 한다. 모든 성도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이끌면 그것이 바른 양육이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이 빨리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를 바랬다. 적어도 사도 요한이 말하는 믿음이 무엇인가? 4절에 보면 “나타나기를 원하시면서”의 뜻은 인기를 말하는데 인기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마태 4장 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이 사탄에게 시험을 당하는 말씀이 나온다. 사탄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인도해서 뛰어내리라고 유혹을 한다. 뛰어내리면 많은 사람들이 보고서 ‘야 굉장하다’고 하면서 인기가 높아질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시험이다. 이때 예수님의 대답은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한마디 하시고 돌아서신다. 형제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자신을 나타내소서’ 재촉하는 것과 마귀가 유혹하여 예수님께 ‘뛰어 내리라’는 것은 똑같은 이야기이다.
    이 때 예수님의 대답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하시며 예루살렘으로 가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생각하신다. 십자가를 생각하신다.
   하나님의 능력을 마귀도 믿는다. 그런데 그 능력을 믿었다고 마귀를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고난 주간에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헌금 269장
적용 :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기 ...고난주간 새벽기도 참석,
      아침 금식이나 작정 금
중보기도 : 교회 부흥, 담임 목사님의 말씀의 능력, 치유의 은사, 다음세대 부흥, 환우들의 치료, 세우신 장로님들과 사역자들,





2019.4-3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2019.4-1 두려워 말라.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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