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광감리교회
로고
메인이미지


  박성일(2004-06-09 17:26:49, Hit : 2089, Vote : 321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요한 13;12-17 )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요한 13;12-17                     (2004. 6. 6 주일저녁/3,4 여헌신)
(첫번째 이야기) Pay it Forward
   나는 지난주에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라는 비디오를 보았습니다. 영어 제목으로는 Pay it Forward 굳이 우리나라 말로 번역을 하면 도움주기라는 말입니다.
12살짜리 트레버라는 아이가 주인공인데 첫 번째 사회 수업 시간에 온 몸에 화상을 입어 2급 장애를 가지고 있는 선생님이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 선한일을 실천하자" 라는 숙제를 내 주는 것을 이 영화는 시작이 됩니다. 이 과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고민하던 중 트레버는 "Pay it Forward" 세 사람에게 도움주기를 실천하고자 피라미드형 도움주기를 실천합니다.
마약 중독자인 노숙자를 불러서 도움을 주고......그렇게 쉽게 변화되지는 않지만 결국 도움주기의 씨앗은 불꽃처럼 번져가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사람이 세 사람에게 도움을 주다보면 결국 세상은 아름답게 변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실천합니다. 불행한 가정 가운데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순수한 도움주기는 그야말로 모든 저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돌려받는 것(pay back)이 아니라 더 많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forward)하도록 하면 정말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변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 인터뷰 할때 트레버는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을 고치는 일이예요"
   우리도 도움주기는 아니라 할지라도 하루에 세 사람 만나서 미소짖기 운동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필리핀에 있을 때 김은숙 권사님이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를 정기 구독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 책이 오는 날을 무지하게 기다렸습니다. 좋은 생각을 읽다 보면 좋은 생각들, 아름다운 생각들을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들을 보면 모두가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잔잔한 감동이지만 우리의 마음을 진하게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것 같다. 나의 삶 가운데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가? 당연히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랄 것이다. 감동을 주는 사람,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나는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랄 것이다. 사람들은 가슴 뭉클하게 하고 눈시울을 뜨겁게하는 감동에 목말라 한다. 사람에게는 엔돌핀보다 무려 5000배나 더 강력한 호르몬이 있다고 한다. 그 이름은 다이돌핀인데 다이돌핀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감동을 받고 기쁠 때 몸에 생성되며 저항력과 생명력과 활력을 증진시키는 호르몬이다.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엔돌핀은 인터 모르핀이다. 몰핀 마약을 맞은 것과 같은 흥분된 상태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마약을 넣듯이 화학적 작용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감동을 받아서 그냥 몸 속에 자연적으로 생기는 기분 좋음이다. 그러므로 감동을 자주 주고받아야 한다.
   요란한 꽹가리를 치고 북치고 장구치는 Event 사역이 아니라 해도 조용히 새벽을 여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임원들의 눈물과 사랑의 사역이 각 속회마다 각 가정마다 각 선교회 마다 일어났으면 좋겠다. 암탉은 알 한 개를 놓고 동네가 떠나도록 울지만 거북이는 생명을 걸고 모랫가로 말없이 올라와서 수백개의 알을 까놓고 소리 없이 바다를 향해 걸어간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감동을 주고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감동으로 그치면 안된다.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지만 삶을 통해서 감동하지는 않으면 그 감동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가 듣고 안 바를 행할 줄 알아야 한다. 행동으로 그 감동을 이끌지 못하면 죽은 감동이다. 사람들이 간증을 듣고 감동을 한다. 그래서 눈물 좀 흘리고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뿐이다. 또 똑같이 생활한다.  
    그래서 일류 인생은 도움을 주는 인생이되는 것이다. 요즘 어떤 사람이 일류인가? 좋은 집에 산다고 좋은 차 탄다고 명품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다. 특히 요즘 여자들이 기준으로 만들어 놓은 1등 신랑감의 기준을 보면 왠만한 사람 아니면 기가 죽어 장가갈 생각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장가가기 위해서 몸부림을 쳐도 이런 기준으로 사람을 찾는다면 장가가기 힘들 것이다. 얼굴도 잘생겨야 하고, 키도 커야 하고, 농담도 잘해야 하고, 좋은 직장도 있어야 하고, 노래도 잘 불러야 하고, 춤도 잘 추어야 하고, 잘 놀아야 하고, 외국인을 만나면 어느 정도의 대화도 가능해야 하고, 컴퓨터/인터넷도 잘해야 하고 ,집이 부자이면 더욱 좋고 등등 거의 슈퍼맨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각각의 항목 중 하나만 잘하면 되던 것이 이제는 special한 즉 특별한 것이 general(보편화)화 되면서 (어느 정도는) 다 잘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탤랜트가 연기만 잘해서는 안되고 운동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머리도 좋아야 하고 멀티 플레이어를 요구하는 시대이다.  
    예전에는 일하면서 배워 그랬지만 요즘에는 기업이 사람을 기다려 주지 못한다. 준비된 사람을 채용한다. 사람이 그래서 슈퍼맨처럼 진화해 간다. 만능이 되어 간다. 엄마들도 남편을 슈퍼맨으로 만들기는 포기하고 자녀들을 슈퍼맨으로 만들기 위해서 엄청난 투자를 한다. 아이들을 엄청나게 잡는다. 경쟁에서 살아 남아야지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심어준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자기 능력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자꾸 엄마 능력가지고 살려니까 얼마나 발버둥 치면서 살겠는가? 저놈 눌러야지...너 30점 맞았어 나는 40점 맞았는데 하면서 비교하면서 누르려고만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은 이런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능력을 행하기보다는 낮은 자리로 들어가기를 바라셨다. 악당을 쳐부수기보다는 한 대 더 맞으라고 다른 뺨을 돌려 대라고 했다.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 교회도 슈퍼맨과 슈퍼 우먼들이 많이 생기는 것이다. 하늘을 날아다니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교회의 작은 곳,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교회를 떠 받치는 기둥처럼 그렇게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나는 진정 이 시대의 슈퍼맨이라고 생각을 한다.  
   고린도전서 4장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다.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의 일군은 어떤 일에 대한 탁월함이 아니라 성실함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이 말한 일군은 헬라어로 디아코노스이다. 디아코노스는 한마디로 종이다. 이 말 안에서 집사라는 말이 나온다. 봉사자이다. 우리가 받은 직책이 목사이든 장로인든 권사이든 집사이든 선교회 회장이든 교사이든지간에 섬기는 자를 말한다.  
   그런데 섬기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강함이다. 강한자가 되지 않고는 섬길 수가 없다. 일단은 슈퍼맨이 되어야 섬길 수가 있다는 것이다.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은 섬김이 아니라 복종이다. 그러나 주인이 종을 섬기는 것은 진정한 섬김이다.
   예수님이 이땅에 종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섬김이라는 것이다. 약해서 섬긴 것이 아니라 강해서 섬긴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는 섬기는 사람만 있지 섬김을 받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를 뽑을 때에도 역시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 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마 20:25-28)고 하셨다.
    나는 무심코 본 이 영화를 통해서 엄청난 인싸이트를 얻었다. 한사람이 세사람 도움주기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도움주기는 아니더라도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칭찬 세마지 혹은 미소 짖기 운동이라도 하자는 것이다. 내 옆에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 아내이든, 남편이든, 자식이든 감동을 주는 한 주가 되었으면 한다. 그러면 세상이 아름다워 질 것이다.  
    그래도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가 무엇인가? 물질이 많아서 세상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랑의 리퀘스트나 사랑의 도미노 같은 일들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서 도와주는 것,
   사람은 금으로 감동이 안 되도 물 한 그릇으로 감동을 시킬 수 있다. 얼굴 예쁜 것으로도 감동은 되지 않는다. 감탄만 있을 뿐이다. 우리를 위해서 수고한 늙으신 어머니의 얼굴이 더 감동적이다. 요즘은 정말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는 사람이 없고 곡을 하여도 함께 우는 사람이 없는 메마르고 삭막한 시대이다. 요즘에는 감동이 아니라 모두가 선동이다. 마음을 읽기보다는 선동한다.
   이 시대가 정말로 필요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요즘에는 기업에서 마케팅을 할 때 고객 만족의 마케팅이 아니라 고객에게 감동을 주는 마케팅 전략으로 나가야 한다고 한다. 노브리스 오블리제 도덕적 의무감을 가지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들을 했으면 좋겠다.
   시대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지금은 지성이 움직이기 보다는 감성이 움직이는 시대라고 한다. 인성을 묻는 면접시험이 더욱 더 중요하게 되었고 대학을 갈 때에도 사회봉사를 얼마나 했는가에 따라서 가산점이 붙는다. 과거에 높은 아이큐가 필요했던 일들은 대부분 컴퓨터가 일을 해 나간다. 이제는 조직 속에서 융화를 이루고 열정이 있고 인격이 있는 사람 그래서 바울을 세워 주었던 바나바처럼 모든 사람들을 용납하고 품어주는 영성을 가진 사람이 정말 감동을 주는 사람이다. 다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넉넉한 인격의 소유자이다.
     성경에 보면 감동의 드라마를 만들어 낸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 주인공 중에 하나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다. 너무나 잘 아는 말이다. 이 이야기는 율법학자의 질문과 함께 시작되는데 결국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 하겠습니까? 그러자 누가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라고 말한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대답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을 한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래 그럼 그처럼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럼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다시 질문하자 예수님이 오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다. 강도 만나서 가진 것 다 빼앗기고 거반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위험은 생각하지 않고 생명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냥 지나쳐도 그 사람에게 뭐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남이 하지 않은 일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감동을 주는 삶이었다. 이 이야기를 마친 후에 예수님이 질문을 한다. 세 사람 중에 누가 정말 참 이웃이냐?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한다. 자비를 베푼 사람 감동을 준 사람이 바로 불쌍한 이웃을 본 사람이다. 이웃을 바로 찾을 때 영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웃을 잃어버리면 영생도 잃어버리는 것이다. 도움을 받은 사마리아 사람 역시 도움주기를 했을 것이다.
    공동체에 감동을 주지 못하는 머리 좋은 사람 이성의 인간을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힘들더라도 나와서 노인들을 위해서 급식담당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정말 감동과 감성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은 사람이 세상을 주도하는 시대가 되었으면 한다.
    예수님을 잡으러 올 때 칼 들고 제사장의 사환인 말고의 귀를 내리친 성난 베드로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핍박 속에서도 감옥에 갇혀서도 기뻐하는 베드로가 더 무서운 존재이다. 싸움 잘하는 사람이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맞으면서도 계속 대드는 사람이 무서운 사람이다. 행 5:41절에 보면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라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 이름으로 온갖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기뻐하는 사람 이런 사람 앞에서 마귀는 사족을 쓰지 못한다. 은혜 받은 자의 증거가 무엇인가? 우리가 기도하는데로 족족히 다 이루어지고 응답되고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하는 것이 참된 은혜가 아니라 예수님 닮아 가는 삶, 그래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 바로 은혜 받은 사람의 증거이다.
   나는 우리 교회가 사람 많이 모이는 교회가 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그 교회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교회라는 소리를 듣고 싶다. 희생하는 성도가 많은 교회, 이런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여기 앉아 계신 모든 분들이 하나님이 주신 그 은혜대로 감동 받고 감동을 주는 한편의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이런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사랑이다. 오늘 3절을 보니까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격이다. 하늘로부터 오셨다가 다시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돌아가실 것을 아셨다. 그런 분이 수건을 들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러 오신 것이다. 수건 옆에 두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제자들은 얼마나 많은 당혹감을 가졌겠는가?
   이런 비상식적인 일을 해야 사람들이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르긴 다르구나하는 당혹감을 주어야 한다. 이때 베드로가 말린다. ‘예수님, 내 발을 씻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 알아야 할 것은 아무런 보상 없이 도움주기도 좋지만 도움을 받았으면 도와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랑한다. 비판만 하는 사람 밑에 있는 사람은 비판만 한다. 주님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고 하고는 절대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가 나오는데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허랑방탕하게 쓰고 돌아왔다. 돼지우리에서 살다가 ‘아버지 집의 품꾼으로라도 받아주십시오’하고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품꾼이 아니라 아들로 맞이한다. 송아지를 잡고 금목걸이를 걸고 신을 신기고 좋은 옷을 입힌다. 염치는 없지만 아버지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 아버지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아들됨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약점은 끝까지 우기면서 내 몸은 씻길 수 없다는 것이다. 내 발은 씻길 수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될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허물 많은 죄인이고 나는 목욕까지 필요한 더러운 종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하나님 앞에 서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발을 씻기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pay it forward, Pay Back 해야 한다. 이런 것이 빚진자의 의식이다.
   14절을 보니까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은혜를 입었으니 나누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나에게 갚지 말고 더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나누라는 것이다. 로마서 1장14절을 보니까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빚진 자 의식을 가진 사람은 특징이 있는데 일을 많이 하고 난 다음에 자랑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어마어마하게 빚진 자이기 때문에 내 공로다라는 의식이 전혀 없는 것이다. 성도의 삶은 섬기는 삶, 희생의 삶이다. 자랑이 없다. 오직 자랑이 있다고 하면 나에게 은혜와 권능을 부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자랑할 뿐이다.  
  저는 공동체의 문제는 공동체 전체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만 대야에 물 떠 수건 들고 와서 발 씻겠다고 나서면 그 안에 교만한 분위기가 절대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서로 내가 크다고 하는 분위기는 절대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없다. 도움주기 그 한 사람만 나오면 전체의 질서를 다 바꾸어버릴 수 있다. 그것이 사랑이다.
  세상은 사랑의 힘으로 무너지게 되어 있고 새로운 질서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한탄하고 정죄한다. 이 교회는 사랑이 없다, 이 교회는 기도가 없다, 말씀이 없다, 찬송이 없다, 전도가 없다……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이 교회의 가장 큰 대적이 된다는 것을 자기 자신은 모른다는 것이다.
   교회에 사랑이 없다고 할 때 한 사람만 나타나서 정말 헌신적인 사랑을 해 보라. 전체의 분위기가 다 바뀌어버린다. 기도가 없다고요? 한사람만 와서 생명 걸고 기도하면 전체가 기도의 분위기로 바뀌게 되어 있다. 찬양이 없다고요? 고통 가운데 찬양하는 사람이 한명만 나오면 전체 분위기가 다 바뀌어버리게 되어 있다.  예수님의 도움주기를 통해서 제자들이 도움을 주는 사람을 변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세 사람씩 도움을 준다면 세상은 정말 아름다워 질 것이고 교회 역시 아름다워 질 것이다. 보다 더 난은 세상을 향해서 새로운 질서를 잡는 헌신하는 선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43)인생은 나그네 길-사라의 죽음(창23:1-16)

Copyright 1999-2018 Zeroboard / skin by z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