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광감리교회
로고
메인이미지


  박성일(2012-06-03 17:19:49, Hit : 1222, Vote : 247
 5. 약함과 악함을 넘어서는 방법


5. 약함과 악함을 넘어서는 방법
창 3장 14절 -24절                                    (2011. 3. 13 주일 오전)
   지난주에는 선악과 치명적인 유혹을 이기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다. 선악과는 아름다운 미끼다. 치명적인 유혹이 있다. 우리를 유혹하는 선악과는 항상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한다. 사탄은 머리가 좋다. 우리의 약점을 찾는다. 그리고 광명한 천사로 가장해서 다가온다. 그리고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다. 깨어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넘어 갈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이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는다. 그래서 결국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벗은 몸인 줄 알고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고 나무숲에 숨어버린다. 죄를 지으면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한다. 두렵고 부끄러운 마음 때문에 얼굴을 들지 못한다. 그래서 텔레비전에 보면 악한 죄를 지은 죄인들을 보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린다. 카메라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다.
    오늘은 창세기 다섯 번째 시간이다. 약함과 악함을 넘어서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한다. 사람이 선악과의 치명적인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다 사람이 약하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하는 우리의 악함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 사람이 필연적으로 지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두 가지 성향인 약함과 악함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한다. 인간은 약해서 넘어지기도 하고 악해서도 넘어지기도 한다. 약함과 악함은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없다.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이겨야 한다. 오늘은 약함과 악함의 문제를 생각해 보고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나누려고 한다.
(1)약함 - 고통의 문제
   선악과를 먹은 후에 하나님은 그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징벌을 내리신다. 먼저 여자에게 임한 징벌은 해산의 고통이다. 여자들이 예전에는 아이를 낳으려 들어갈 때 자기 고무신 한번 쳐다보고 들어갔다고 한다. 다시 신을 수 있을까? 엄마의 생명을 담보로 아이의 생명을 낳는 것이다. 예전에는 10명도 낳아서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다. 밭을 메다가 배가 앞에서 밭 이랑 가운데서 애기 낳고 또 밭을 메었다고 아니다. 그럴 수 없다. 10명을 낳아도 두려운 것이다. 아이를 낳을 때 웃으면서 낳는 산모는 없고 아이도 웃으면서 나오는 아이가 없다. 똑같이 애써야 생명이 탄생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해산의 고통은 엄청난 것이다. 생명을 탄생할 때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 출산을 한다. 그래서 엄마는 자신의 몸숨을 담보로 아이를 낳기 때문에 아이를 생명처럼 사랑한다. 이런 해산의 고통이 여자에게 내린 하나님의 형벌이다.
    남자에게 임한 고통은 창 3장 17절에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 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육체적 고통이다. 범죄의 결과 땅이 저주를 받았다. 에덴동산에서는 손만 닿으면 먹을 것 천지였다. 필요한것은 다 있었다. 원하는 선악과만 못먹었지 사는데 필요한 것들은 다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것과 원하는것 사이의 격차가 커지면 커질수록 불행해 지는 것이다. 그런데 안먹어도 되는 선악과를 먹음으로 범죄해서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다. 그래서 땀을 흘려서 일하지 않으면 땅이 굶어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에덴에서 쫓겨난 땅은 씨를 심어도 열매가 나지 않고 가시덤불이 있는 땅이었다. 거친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그렇게 일하고도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이 고통의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우리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타락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받은 하나님의 징벌은 결국 생존이고 안전의 문제이다. 사람들은 생존을 평생 땀을 흘려 수고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고 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 안전을 위협 받는 존재가 되었다.
   지금도 우리는 이 생존과 안전의 문제를 위협 받으면서 살고 있다. 오늘도 무사히 내일도 무사히 내일 일을 알 수 없어서 사람들이 불안해하면서 보험도 들고 또 어리석은 사람들은 팔도명산산신도사나, 구름도사를 찾아다니면서 내가 어떻게 하면 번성하고 안전하게 잘 살 수 있을까 물어보러 다닌다. 점을 보러 다니는 것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도 점 보러 다니고 싶어서 미칠 지경에 이른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점쟁이는 아니더라도 교회에서 기도 좀 하는 용한 권사님에게 예언기도 받는 사람도 있다. 내가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콕 집어서 내 앞날을 말해 주시면 좋겠건만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것 같으니까 콕 찝어서 말을 해주는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이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불안한 미래의 생존과 안전 때문에 이렇게 점을 치러 가는 것이다.
   혹시 이런 사람은 우리 교회에 없을줄 알지만 매일 성경을 가지고 점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아침마다 눈을 감고 성경을 펴서 손가락으로 짚어진 성구로 그 날의 행동 원칙을 삼은 것이다.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마5:39)는 성구를 짚은 날은 어떤 일이 있어도 화를 참았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라는 성구를 짚은 날은 돈에 대해서 좀더 조심해서 살고 그렇게 성경점을 보면서 살았다. 그런데 하루는 눈을 감고 성구를 짚었더니 "유다가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27:5)는 성구가 짚어졌다. 별로 좋은 점괘가 아니다. 다른 곳을 짚었더니 이번에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7)는 성구가 나왔던 것이다. 그럼 유다처럼 목매서 죽으란 말인가? 그다음 부터는 성경 점을 보지 않고 성경을 가지고 Q.T를 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어떤 사람이 똑같은 방법으로 성경을 보는 사람이 있다. 그날 아침에 성경을 딱 폈더니 마태 복음 7장 7절이 나왔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 오늘 뭔가 좀 좋은 일이 있겠구나. 오늘은 7이 두 번 겹쳤다. 행운의 날이라고 생각을 했다. 이 성경을 보고 오늘은 7자가 행운의 숫자이구나 하면서 외출을 하는데 벼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마침 7번 버스가 왔다. 그래서 이것 한번 타보자 하고 타고 가디가 일곱 번째 정거장에서 내렸다. 딱 내리니까 경마장이었다. 말가지고 도박을 하는 곳이다. 그래서 마권을 사서 7번 말에다가 돈을 올인 했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되었는데 자기가 건 그 7번 말이 7등을 해서 쪽박을 찿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들이 우스운 이야기지만 나오는가? 실제로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존과 안전의 문제를 누구에게 맡겨야 하는가? 고통을 당할 때 이렇게 반응을 하는 사람이 돼서는 안된다.
   그리고 또 물질주의적 세계관 속에 있는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돼 하나님 필요 없어 그래서 재물은 눈에 보이고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돈이 나를 생존하게 하고 나를 안전하게 보호해 줄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악착같이 돈을 모은다. 그런데 다 써보지 못하고 불쌍하게 살다가 간다. 돈은 축적 개념이 아니라 사용개념이다. 사용되어질 때 가치가 있는 것이지 돈이 내 주머니 안에 있다고 해서 내 배고픈 배가 배불러지는 것이 아니다. 그 돈을 가지고 자장면이라도 사먹어야지 그렇게 사용되어야지 가치가 있는 것이다. 돈이 내 안전을 지켜주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조심 하고 또 조심해도 고통스러운 불행은 온다.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내 삶 가운데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해 할 수 없는 고통이 있다.
   내가 성덕교회에 부목사로 있을 때 집사님 아들이 있었는데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다. 제대를 한지 7일만이다. 제대를 하고 나서 오토바이를 사달라고 엄마를 졸라서 7일만에 오토바이를 사주었다. 그런데 그 사준날 친구 뒤에 태우고 달리다가 교통사고로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뒤에 탄 친구는 중상을 입은 일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집사님 댁에 갔는데 사람도 못알아 보고 실성한 듯이 우는 것이었다. 내가 그곳에 가서 그 집사님에게 뭐라고 말한들 위로가 되겠는가? 그냥 같이 붙잡고 울다가 왔다. 하루아침에 이런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럴 때 약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가? 살아 계시면 왜 나에게 이런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나서 나를 괴롭게 하는가? 항변하면서 울부짖는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하면 이겨 낼 수 있는가? 욥이 좋은 모델이 될 수는 있다.
   욥을 한번 생각해 보라. 욥은 고난의 대명사이다. 욥 1: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우스 땅은 우상을 섬기는 땅이었으나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 악한자가 아니다. 2절에 보면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있었고” (10명이다.) 3절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부러울 것이 없는 부자였다. 자식들이 10명이니까 혹시라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지은 죄가 있을지 몰라서 회개의 예물을 드리는 그런 사람이다.  
   어느날 세상을 두루 살피고 온 사탄이 하나님 앞에 선다. “어디를 다녀 오느냐?” “세상을 두루 살피고 왔습니다.” “그래 그럼 내 종 욥도 보았느냐? 이 세상에는 그 사람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자 사탄이 주님께 아뢰었다.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주님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울타리로 감싸 주시고, 그가 하는 일이면 무엇에나 복을 주셔서, 그의 소유를 온 땅에 넘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라도 주님께서 손을 드셔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치시면, 그는 주님 앞에서 주님을 저주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탄에게 말씀하신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네게 맡겨 보겠다. 다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아라!" 그 때에 사탄이 주님 앞에서 물러갔다.
    이때부터 사탄이 욥의 생명만 남겨 놓고 다가져간다. 욥이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쓰나미처럼 몰려 왔다. 일본도 지금 쓰나미로 말이 아니다. 하루아침에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자녀들도 한상에서 밥을 먹다가 지붕이 내려앉아서 한꺼번에 잃는다. 재산도 한방에 훅 날아가 버린다. 건강도 온 몸에 악창이 나서 괴로워한다. 그래서 욥은 잿더미에 앉아서, 옹기 조각을 가지고 자기 몸을 긁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부인 욥에게 와서 말한다. “이래도 당신은 여전히 신실함을 지킬 겁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서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부인에게 “당신까지도 어리석은 여자들처럼 말하는구려.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 이렇게 하여,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말로 죄를 짓지 않았다.”
    건강 재산 자녀 이런 모든 것들이 욥에게 절대적이었으면 재산을 잃어버리거나 자식이 죽거나 아내가 도망을 가거나 건강을 잃어 버렸다면 삶의 의미가 없어져서 저것 없어지면 나도 의미가 없어 하면서 목메어서 자살을 할 수 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나가는 것은 다 잃어도 하나님을 믿는 마음을 잃지 않겠다는 마음 때문에 다른 것은 다 상대적이지만 하나님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 때문에 내 삶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욥은 주신자도 하나님이시요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고백을 한다. 이런 고백을 하는 욥에게 무슨 시험이 오고 넘어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사탄은 이유를 중심으로 접근을 한다. 욥이 건강하고 부자였고 아내도 있고 자식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접근을 한다. 그것 다 없어지면 욥이라도 불평할 것이라고 말을 한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조건을 건다. 그것 다 없어지면 하나님 원망 할 것이라고 말을 한다. 그런 사탄의 말에 하나님은 욥을 믿는다. 그래 그럼 생명만 남겨 놓고 한번 해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는 욥의 생명만 남겨놓고 욥을 철저하게 파괴한다.
   사탄은 사람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안다. 약하다는 것..이해 할 수 없는 고난이나 고통이 올 때 하나님 배반하고 원망할 것이라는 것을 그렇게 사람이 약하다는 것을 안다. 사람이라는 것이 이유가 있어야 기뻐하고 이유가 있어야 감사하고 이유가 있어가 기도한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뻐하거나 감사할 수 있는 모든 이유들을 다 막아버린다. 자녀도, 건강도, 재산도 다 가져가 버린다. 이것이 마귀의 공격이다.
   우리에게 오는 고통 가운데 하나가 생존과 안전의 문제이다. 아담에게 벌을 주시는 것도 땀을 흘려야 이땅을 살아가는데 굶어 죽지 않고 살 수 있어..그리고 에덴에서 쫓겨나는 순간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다. 두려움 가운데 고통 가운데 불안해 하며 살 수 밖에 없다. 지금 우리가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것도 바로 사는게 너무 힘들다. 청년실업, 직장 불안 돈은 없고 쓸 곳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에 대한 염려이다..상대적인 가난함 때문에 괴로워 한다. 생존과 안전의 문제가 우리를 괴롭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유리하며 방황 할 때 먹고 마시고 입는 것..가장 기본적인 것의 어려움이 있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생존과 안전의 문제를 하나님께 철저하게 의지하게 하는 훈련이 필요했다고 생각하셨다. 그들이 생존과 안전의 문제를 느낄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을 때 그 이유를 찾아가며 하나님께 원망을 하고 적들이 쳐들어와서 전쟁을 해서 안전의 문제가 위협을 받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했다.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내 삶가운데 일어나면 빨리 답을 찾으려고 점쟁이들을 찾아간다. 그런데 그럴때 시험이 온다. 요셉이 고난을 당할 때 그가 답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 내가 지금 왜 이렇게 고통을 당해야 하나요? 빨리 답을 달라고 하지만 모르면 그냥 놔두고 기다리면 된다. 지나다 보니까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인도해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약속하셨다. 하늘의 별처럼 많을 것이다. 그러면 그 약속을 믿고 나가야 하는데 그게 이루어 질것 같지 않으니까 그가 생각한 쉬운 방법이 무엇인가? 하갈을 취하자 그래서 결국 이스마엘이라는 자녀를 얻는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사는 방법은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세가지 시험을 받으셨는데 첫 번째가 떡의 시험이다. 떡의 시험이 생존의 문제이다. 먹고 사는 것에 대한 시험이다. 사탄이 먹을 것을 가지고 시험한 것은 이것이 사람들에게 잘 먹혀 들어가기 때문에 시험을 한 것이다. 그래서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기 못하게 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생존과 안전의 문제 때문에 넘어진다.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넘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고통이 있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방법은 성령의 능력이다. 성령의 능력이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내 힘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다. 나를 바라보면 무너지고 약해지지만 내가 주님 안에서 능치 못함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래서 기도하는 인생이 강한 인생이고 무너지지 않는 인생이다. 무릎을 꿇는 인생이 넘어지지 않는다.
(2)악함의 문제 - 죄의 문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떠나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떠난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세상이 악해졌다. 신문에 보면 온갖 악한 일들이 일어난다.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대부분 예수 믿는 사람을 만난다. 그래서 죄의 노출이 별로 없다. 그런데 세상에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항상 세상에 악에 노출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를 한다. 정직하게 살라 이런 말씀을 하면 사람들이 정직하게 살아야지 하면서 결단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진짜 강대상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 몸부림 치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가?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나가 말씀 붙들고 살려고 몸부림 치면 악한 세상과 부딪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좀 편안하게 악한 세상과 적당히 타협을 하면서 살려고 한다. 하나님 말씀 잘 안 들으려고 한다. 들으면 부담감이 생기고 들어서 안 지키면 더 마음이 아프고 그래서 말씀 들은 것을 감당을 안 할려고 한다. 그래서 몰래 예배드리고 가는 것이고 인터넷 들어가서 이 설교 듣고 저 설교 듣고 아무런 헌신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 말씀을 듣고 삶 속에 적용해서 살려고 하면 악한 세상과 타협이 안 되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설교는 듣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한 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대로 듣고 사는 것이 신앙이다. 말씀 들고 악한 세상에 나가서 살아봐라 그러면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딤후 3장 12- 14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경건하게 사는 사람은 박해를 받게 되어 있다. 말씀대로 경건하게 살면 살수록 속이는 자들이 많이 있다. 안티 기독교인들이 기독교가 무슨 잘못을 하기만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인터넷에 올린다. 개독교니...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악하다. 그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가 나빠서 그 사람이 그렇게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나빠서 그렇게 비판을 하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도덕적 기준이 높기 때문에 그렇다. 이 악한 세상 내 힘가지고 살면 질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
   얼마나 세상이 타락되어 있는가? 세상의 가치를 보면 능력 있는 남자가 어떤 남자인가? 돈 잘벌고 스테미나 넘치는 남자 몸이 짐승처럼 잘 빠진 남자가 세상적으로 좋은 남자이다. 좋은 여자가 어떤 여자인가? 신앙있는 여자 착한여자 인격 있는 여자가 아니라. 팔등신여자 섹시한 여자를 좋은 여자라고 한다. 요즘 섹시라는 말이 흔하게 쓰인다. 얼마나 단어가 선정적인가? 아무 한테나 이런 말을 한다. 목사님 섹시해요..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이런말 쓰면 안된다. 세상이 이런 선정적인 단어를 받아들일 만큼 악해졌다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 보면 욕 베틀 게임이 있다. 채팅으로 욕 베틀을 한다. 누가 누가 더 욕을 잘하나. 욕으로 인터넷 상에서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 잠시 할 욕이 없으면 패배를 하는 것이다. 누가 더 욕을 잘하나 아이들이 지금 이런 악한 세상에 노출이 되어 있다. 세상이 정상적이지가 않다.
   그리고 세상이 얼마나 선정적이 되었는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 쾌락만을 추구하다보면 모든 사람들을 다 성적인 대상으로 생각을 한다. 7살 8살 짜리 아이들도 성적 대상으로 생각을 한다. 인격으로 보지 않는다. 미친세상이다.
    노아가 살던 때 하나님이 물로 심판하시기로 작정을 했다. 왜? 성경에 보면 그 땅에 사람의 딸들이 득세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유혹해서 넘어지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니까 정신이 나가버린 것이다. 너무 예쁘다. 그 선정적인 모습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넘어가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도 저렇게 즐겁게 사는구나 하면서 영혼이야 어찌되었든지 사람의 딸들처럼 살아 보았으면 좋겠다라는 욕망이 싹트기 시작한다. 인간의 딸들을 보니까 얼마나 그 미모가 뛰어난지 나도 막 살아야지 예배를 포기하고 하나님 떠난 삶을 살면서 타락한다. 창세기 6장에 보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 하는 모든 자”를 아내로 삼았다. 맘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아내로 삼아 보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여 주여 하던 사람들이 사람의 딸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어둡고 컴컴한 곳에서 나쁜짓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더 이상 그들의 행위를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창세기 6장 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본능대로 감정대로 사는 것을 볼 수가 없어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모든 생각들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은것을 한탄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쾌락만 추구하다보면 사람들의 인격은 보이지 않는다. 성적 대상만 보이는 것이다. 세상이 이처럼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사람을 볼 때 인격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런것 제정신으로는 못한다. 술이나 마약이 문제라는 것이다. 집단적 흥분상태속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
    세상이 선정적이기도 하지만 폭력적이다.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먹부터 나오는 세상이다. 창세기 5장에 보면 라멕이라는 사람이 나온다. 가인의 6대손이고 아담으로부터는 7대손이다.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일부다처이다. 아내가 둘이 있는데 그 아내 이름은 아다와 씰라였다. 그런데 이 사람이 창세기 5장에 보면 복수의 노래가 나오는데 라멕은 자신의 아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내가 얼마나 잔인 한지 자랑을 한다.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내가 손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라멕은 아주 야만적인 노래를 한다. 노래 제목이 건딜면 죽어이다. 조금만 건드려도 내가 77배로 복수 하겠다는 것이다. 조그만 상처만 내도 그 보복으로 내가 살해를 하겠다는 것이다. 나의 상함을 인하여에서 인하여 라는 전치사는 ”하자 마자“로 번역을 하면 ”내가 나를 때리자 마자, 건딜자 마자 나는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다.“ 무서운 노래이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짐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생각하는 것의 한계이다. 그래서 선악을 바르게 분별할 줄 아는 것이 아니라 판단력이 상실이 되었다. 기분에 따라서 판단이 된다. 내가 그날 기분 나쁘면 동일한 상황에서도 나쁘게 판단을 하고 기분이 좋으면 좋게 판단을 한다. 우리가 그래서 죄성을 극복해야 한다. 고의적으로 반항을 하고 고의적으로 안되기를 바라는 삐딱한 마음이 있다. 바울의 고민이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래서 이런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이 자신에게는 없다고 고백을 한다. 그래서 8장 1절에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래서 성령님에 의지해서 좋은 것에 반응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실 때 좋은 것에 반응하도록 만드시는데 그에 대해 순종하라는 것이다.
   덷전 5장 21절에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범사에 좋은 것을 선택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그가 원했던 선악과를 먹은 후에 얼마나 힘들고 불행하게 살았는지 우리는 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생활이기 때문에 잘 살아버리면 된다. 기도 하라 그러면 기도하면서 살아버리는 것 감사하라 감사하면서 살아 버리는 것이다. 염려하지 말라. 염려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들은 말씀이 10%이면 90%는 살아버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이제는 선악과를 따 먹은 우리 인간들이 더 이상 선악과를 따 먹고 약해지지도 악해지지도 말자. 잘살아 버리는 성도가 되자. 생존과 안전의 문제로 인해 두려워 하지 말고 이제는 성령의 능력으로 약한 것을 이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악한것을 정복하는 대광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4. 선악과 - 치명적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방법

Copyright 1999-2018 Zeroboard / skin by z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