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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일(2004-07-05 20:39:41, Hit : 2585, Vote : 485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갈라디아서 6:1-10)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갈라디아서 6:1-10                     (2004. 6. 20 주일저녁)
   먼저 설교를 들어가기 전에 도그빌이라는 영화를 잠깐 소개라고 말씀을 드리려고 한다. 처음부터 이 영화는 심상치 않게 시작을 한다. 니콜 키드만이라는 매력적인 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연극적인 요소를 가지고 영화에 도입을 했다. 영화는 세트중심으로 시작이 된다. 도그빌이라는 영화의 제목에서 말해 주듯이 개 마을이다. dog villige 이다. 사람이 사는 마을인줄 알았더니 개같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이 영화의 배경은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0년대, 무대는 로키산맥에 위치한 도그빌이라는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에 그레이스라는 정체불명의 여자가 갱단에게 쫓겨 들어오면서 이 영화는 시작된다.
  이 평온한 곳에 어느 날 밤 총소리가 들리고 한 미모의 여자가 마을로 숨어 들어온다. 뭔가 두려움에 떠는 여자, 비밀을 가진 여자이다. 그녀를 처음 발견한 자칭 작가 지망생이자 동네 개똥 철학자인 톰 에디슨이다. 마을 사람들과는 다르게 톰은 그레이스를 돕는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이상세계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도덕강의를 하고 사람들은 하품을 하면서 억지로 그 도덕 강의를 들어준다. 그는 그날도 수용 (받아들임)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도덕강의를 하는데 받아들임에 대한 적당한 실례를 찾지 못한다. 그러다가 그레이스라는 여인이 도망자 신세로 그 마을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레이스에게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그녀를 숨겨주자고 동네 사람들을 설득하고 결국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지고 그레이스는 곧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톰의 설득으로 그레이스에게 주어진 지간은 2주의 시간이다. 그리고 2주의 시간이 지난 뒤, 도그빌 사람들은 천사 같은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도망다니는 그레이스에게 도그빌은 그녀에게 안식처를 재공했다. 그래서 호의적으로 그레이스를 돕는다. 그레이스 또한 자신을 보살펴주는 톰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에 경찰이 들이닥치고, 그레이스를 찾는 현상 포스터가 나붙는다. 그 포스터를 보자 소박하고 착해 보이기만 하던 도그빌 사람들은 점점 그녀를 의심하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갱단의 위협과 상금의 유혹이 점점 짙어지자 그레이스에 대한 이들의 감정과 행동은 점점 변해간다. 숨겨준다는 대가로 그레이스를 견딜 수 없는 노동과 성적 학대 속으로 몰아넣는다. 결국 그레이스는 마을을 탈출하기로 결심하지만 그녀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개목걸이를 채우기까지 한다.
    결국 이 영화는 한 마을에 천사가 나타나고... 천사는 그 마을에서 인간의 악마적 본성을 확인한다는 내용이다. 도그빌의 주민들에게 노예처럼 학대당하고 강간당하고 모욕받는 그레이스의 이야기는 인간 본성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레이스가 힘없는 도망자에게 당하는 것을 볼 때 정말 마음이 아펏다. 내가라도 가서 복수 하고 싶었다. 경찰이 오고 그녀를 숨겨준 댓가로 남자는 그녀에게 몸을 요구하고 ....그렇게 온갖 수모를 겪는다.
   이 여자가 이 마을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 마을은 조용한 마을이었을까? 정말 선량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었을까?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본성 자체가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떤 상황에 들어가면 나뻐질 수 있다.  
    제가 전에 인간 본성에 대한 설교를 한적이 있다. 루소라는 사람의 사회 계약론을 이야기 하면서 루소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은 원래 선한 것인데 인간을 인위적으로 누르고 있는 폭력 구조에 의해서 인간이 점점 악해 진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런 모든 것들을 풀어주어서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간다면 진정한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는 루소의 사상이다. 그래서 루소의 눈에 볼 때 권력의 상층 구조에 있는 사람들은 다 구역질나는 사람으로 보는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루소는 이렇게 외친다. "모든 개혁자들이여 계몽주의자들이여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었던 모든 제도와 규칙과 관섭으로부터 해방시켜라"그러면서 해방의 논리를 이야기한다. 이런 루소의 영향이 19세기에 들어오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 역시 깨버려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교회라는 구조를 깨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 역시 인간을 구속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소가 생각했던 것처럼 정말 멋진 사회가 왔는가? 루소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급진적이고 제한 받지 않은 자유를 주장한 사람들이 결국에는 가장 억압적인 제도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물론 루소 역시 피해 망상으로 괴로워하면서 파리의 북쪽 에르므농빌에서 죽는다.
   로베스 피에로라는 사람이 루소의 영향을 철저하게 받은 사람이다. 이런 급진주의자들이 정권을 잡게 되자 파리의 피의 혁명을 일으켜서 정권을 잡게 되자 200여명을 단두대에 보내는 그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게 된다. 악으로 악을 대항한 것이다. 결국 악으로 악을 대항하면 단두대로 죽게 된다는 교훈이다.
   영화 평론가들은 도그빌이라는 영화 역시 예수의 수난극으로 상징이 되는데 도그빌과 그레이스의 이야기가 성서에서 성서적인 통찰력에서 빌려왔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그레이스(은총)는 타락한 지상에 내려온 천사이거나 예수라는 것이다. 도그빌 사람들이 그레이스에게 강제로 채운 사슬과 족쇄는 십자가 상징이고. 나중에 그레이스의 아버지로 밝혀지는 갱단 두목은 냉정하고 잔인한 구약의 신이라는 것이다. 심판의 신이다.
   도그빌이라는 영화에서 자신을 모욕하고 겁탈하고 폭행한 도그빌을 가차없이 처단한다.  
딸을 찾으러 온 갱단의 두목과 그레이스가 이야기 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아버지는 개만 죽이자고 한다. 아버지가 말하기를 나처럼 고고한 성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용서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레이스는 그들은 인간이라고 이야기 한다.
   본보기로 개를 쏘와서 걸어 둔다면 효과가 만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레이스는 언젠가는 또 다시 이런 일들이 생길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세상을 위해 이런 곳은 없어져야 한다고 말을 한다. 당한대로 갚는거죠...그래서 결국 자기를 사람 취급하지 않고 개취급한 도그빌 사람들을 모두 심판하기로 한다. 좀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권력을 사용하겠다고 한다.
    도그빌의 사람들은 모두 살해당하고 도그빌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 속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영화가 끝이 난다. 결국 살아 남은 것은 그 마을의 상징인 개다.
    이 이야기에서 말하는 복수는 정말 피의 복수인가? 그런데 복수가 아니라 청소라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그레이스와 아버지의 대화를 보면 그레이스는 처음에 마을 사람들의 잘못을 옹호하고 그들에게 관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엄격한 질서와 단죄가 먼저여야 한다는 아버지의 주장을 결국에는 받아들인다. 이 영화에서 그레이스는 복수심에 찬 피해자가 아니라 이성적이고 냉정한 재판관으로 나온다. 도그빌 시민들이 무참하게 갱단에 의해서 처형당한 건 그레이스를 학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학대 과정 중 자신들의 위치를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사람으로서 해야할 도덕적인 의무감이나 그런 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개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개처럼 죽어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그레이스의 복수가 아니라 악에 대한 청소로 끝을 맺는다.  
  그래서 이 영화의 메시지는 생각외로 복잡하다. 우선 감독은 도그빌의 시민들을 처음부터 사악한 존재로 만들지 않았다 것이다. 그들은 결점투성이이고 어리석지만 악마들은 아니었다. 그들이 그레이스에게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는 건 그들이 그녀가 누구인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만일 처음부터 그녀의 정체를 알았다면 도그빌 사람들은 그녀에게 이런 학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갱단의 두목의 딸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나약한 여자를 괴롭혔을까? 그녀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누구인지 알아도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다. 순진한 사람들이 자신의 이득에 공격적이 되어 버리고 협박에 겁에 질릴 정도로 겁쟁이가 되고 눈 앞에 놓여 있는 떡에 쉽게 굴복해 버리는 냐약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범죄자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범죄의 욕구를 가지고 있지만 기회가 없을 뿐이다. 도그빌이라는 마을은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마을이었다. 범죄를 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제 이 어리석은 집단들이 죄를 짓는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한가지 더 관심있게 보아야 할 것은 자칭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이다. 톰 에디슨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어줍지 않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동네 개똥 철학자이다. 마치 자신이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착각을 한다. 그래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본다고 생각을 하고 다른 사람들은 무뇌증 환자처럼 바보라고 생각을 한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정신적으로 우월하다고 믿지만 그 조잡한 지식 때문에 자신과 마을 사람들 모두를 타락의 구덩이에 빠뜨리는 한심한 친구의 이야기가 나온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 곱지 않은 눈을 가지고서 서슴지 않고 바리새인들은 폭력을 가한다.
    결국 톰은 그 여자를 붙잡아 두기 위해서 이런 간교한 일들을 꾸미고 이 톰은 그레이스의 총에 맞아 죽는다. 결국 그 마음에서 살아 남는 것은 모세라는 이름을 가진 개만 도그빌의 심판을 본다.  
   고린도 전서는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고린도 교회가 지식은 있었지만 사랑은 없었고 덕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되게 만들지 못하고 세우지 못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의 잘못이 있으면 캐내어서 들추어내고 까부수었다.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으면 아버지의 비리를 들추어 낼 수 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을 그렇게 하지 못한다. 세상사람들이 아들을 비난해도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런 것이 사랑이다. 너 이것 모르지 이것도 몰라 이 바보하면서 자신이 보는 것이 마치 진리인양 또 다른 악으로 가하는 것이 톰의 잘못이다. 그래서 베드로 후서 1장 5절의 말씀처럼 믿음에 덕을 쌓고 덕에 지식을 경건을 절제를 인재를 형제우애를 사랑을 쌓아야 한다. 그것 쌓지 못하면 교만한 자가 되어서 넘어지고 만다.
    우리고 마찬가지이다. 많이 배우고 지식이 늘다 보면 보는 눈이 열린다. 눈이 열리게 되면 왜 저렇게 밖에 못하지 하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기준을 가지고 쉽게 판단을 해 버린다. 그러다 보면 비판을 하게 되고 비판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주변에서 멀어지고 결국에는 왕따가 된다. 사람은 비판으로 친구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동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래서 외롭게 사는 것이다. 지식만을 가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바리새인이 되지 말자 자신이 가장 선하고 의로운자라고 착각하지 말자 한번 무너진 사람은 너 죽고 나 죽자라는 식으로 덤빈다.
   이 영화가 결국 가지는 매력은 희생자 그레이스라는 여자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힘없이 군인들의 조롱을 받으면서 죽어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레이스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결국에는 그레이스는 마지막에 자신을 괴롭혔던 그들을 청소해 버린다. 그레이스가 잘했다. 혹은 그레이스를 오히려 단죄해야 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나는 지난 생일날 우리 선교단에서 어항을 하나 사무실에 사다 주었다. 그런데 내가 열대어를 오랫동안 키워서 잘 키울줄 알았는데 10마리의 수마트라가 한 마리씩 죽더니 마지막 한 마리도 3일전에 죽었다. 그런데 죽은 아홉 마리는 죽엇을 때 빨리 꺼내 놓았다. 왜냐하면 죽은 것 때문에 물이 오염이 될 수 있어서.....그래서 결국 한 마리 마져도 죽었다. 아직 그것은 탱탱 불어서 어항속에 있지만 다시 물을 갈고 썩은 물고기를 제거해야 한다. 썩은 것을 제거하는 것이 모든 것을 위해서 좋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레이스 역시 모든 사람을 죽인다.  
   이 영화에서 도그빌 사람들이 가장 얄미워 보일 때는 그들이 그레이스를 겁탈하고 폭행할 때가 아니라 한참 피곤해하는 그레이스 옆에 붙어 자는 걸 방해할 때였다. 가만히 있는 사람 건딜면서 졸린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것처럼 나쁜 일은 없기 때문이다. 위해준다는 명목으로 피곤해 있는 그레이스를 귀찮게 하는 톰이 정말 거슬렸다. 하루종일 사람들에게 시달려서 피곤해서 잠이 들려고 하면 귀찮게 한다. 도그빌 사람들은 아주 가혹한 심판을 받았다. 그 중에 한 사람의 의인만 있었어도 도그빌이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오늘 제목을 하나님 어떻해야 합니까? 목회적인 고민이다. 우리나라 속담에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사촌이 안되기를 바라는데 잘되면 기분 나쁘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우리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1절에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라고 했다. 정말 어려운 일인데 너 자신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악한 사람이 악하게 대항해 오면 악하게 대항하지 말라는 것이다. 너도 살펴보아라 그리고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온유한 심정으로 대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나는 목사의 아들로 자라났다. 그리고 지금 목사이다. 무언의 강요가 환청처럼 들린다. 너는 목사아들이다. 내가 목사가 되지 전에는 내가 목사가 아닌데도 목사 아들이라는 강요가 있었다. 목사 아들이 왜 저래 하면 깨갱하고 죽어야 만했다. 내 속에 열이 있는데도 그 열을 뿜지 못하고 살아왔다. 목사 아들이기 때문에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목사 아들이라는 말을 간혹 한다. 내가 목사 아들이라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았는데 내 아들이 나하고 같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되는데...싸우고 싶어도 목사 아들이 싸우면 안되지?
    그런데 저는 도그빌이라는 영화를 보고 오늘 갈라디아서에 있는 말씀을 읽고 혼동이 온다. 심판이라는 명목으로 더 이상 악이 존재하지 못하도록 내가 또 다른 악이 되어서 깨끗이 청소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온유한 마음으로 나 자신부터 먼저 돌아보아야 하는지?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목사가 할말을 못하고 있으면 그것은 또 다른 죄라고 생각을 한다.
   갈라디아서에 심은대로 거둔다는 말씀이 있다. 가장 좋은 씨앗은 사랑이다. 마가복음 4장에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가 나와 있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는 씨뿌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같다"는 것이다.
   행동하는 사람하고 이론만 가지고 있는 사람하고 다른 것이 무엇인가? 이론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난폭하고 잔인하다. 히틀러도 책을 엄청나게 읽은 이론가이다. 이사람이 게르만족의 우월성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열등한 종족은 없어져야 한다는 잘못된 신념을 가지고 600만의 유대인을 학살한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것인줄 몰랐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잘못되었다고 하는데 자신만 잘못된것인지 몰랐다.  
   많은 젊은이들이 과격한 경향을 보는데 그것은 현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9장 24절에 보면 제자 요한은 자신들의 반대자를 “다 죽여버릴까요”라고 말했던 과격한 사람이었다. 이론만 접하니까 이런 결과가 온 것이다. 우레의 아들과 같은 요한이었지만 현장 가운데 나아가니까 사랑의 사도가 되는 것이다.
    아마도 개처럼 취급받았던 그레이스는 도그빌 사람들을 다 죽였다. 그레이스도 그 사람들을 죽일 목적은 없었다. 훌륭하지는 못했지만 노력하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레이스가 걱정한 것은 이들이 용서를 한다고 고쳐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 자신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심판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복수라는 이름으로 심판을 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라 용서를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이것은 우리가 풀어야할 숙제이다. 그런데 오늘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해답을 준다. 6절에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자 하나님은 만홀이 여기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심은대로 거두시는 분이다. 잘못된것들에 넘어지지 말자. 희망의 빛을 가지고 절망을 딛자. 그래서 선을 심자는 것이다. 선을 심으면 결국 선을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만일 그레이스였다면 나도 총을 들고 그 사람들을 청소했을 것이다. 내가 예수님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십자가지지 않고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당장 불로 심판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가끔씩 내 귀에 환청처럼 들리는 음성, 너는 목사이지, 이런것들이 계속 들려진다. 이것으로 인해서 내가 계속 아프지만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참으신 예수님 생각하면서 살았으면 한다.
   하나님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게 길을 보여 주소서....나는 아내가 있어서 참 좋다. 내가 열받아 할 때 나보다 더 열받아서 내 열을 식혀주는 아내가 있어서 참 좋다. 내가 목사 아들이라서 내가 목사라서 하고 싶은말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내 대신 내 속을 시원하게 해 주는 아내가 있어서 참 좋다. 아니 나와 함께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같은 방향을 바라 볼 수 있는 아내가 있어서 참 좋다. 나는 그리고 내 아내와 같은 여러분들이 있어서 그래도 행복한 목사여서 난 참 좋다.





(44)이삭 장가들이기(1)(창 24;1-9)
뒤엉킨 영성(이사야 48장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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