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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일(2004-07-05 20:40:50, Hit : 3148, Vote : 487
 (44)이삭 장가들이기(1)(창 24;1-9)


이삭 장가들이기(1)
창 24;1-9                             (2004. 6. 20 주일오전 9시)
   24장의 내용은 엄청나게 길다. 특히 2-67절까지 이 긴내용은 이삭이 장가가는 이야기에 대해서 나와 있다. 이삭의 장가가는 내용이 이렇게 길게 기록된 것을 보면 이삭의 장가가 창세기에서는 참 중요한 사건이고 이 결혼식이 의미하는 바는 정말 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지난주에 우리는 사라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무리 미모가 뛰어난 사라라고 할지라도 죽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보낸다. 그 뒤로 아브라함은 30년 가까이 살지만 죽은 아내를 부여잡고 애통하면서 울었다. 지난주에는 사라의 장례식에 관한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오늘은 이삭의 결혼식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삭의 결혼이야기는 너무나 길게 되어 있어서 두시간에 걸쳐서 이삭의 장가가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한다. 장례식에 너무 집중해서 죽은 사람만 붙잡고 있으면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장례식 뒤에 결혼식이 이어지고 슬픔 뒤에 기쁨이 이어지고 눈물 뒤에 웃음이 비 온 뒤에 햇빛이 주어지는 것처럼 오늘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가정에 경사스러운 일이다.
     아브라함은 이제 새 식구를 맞아들이려고 한다. 이삭이 장가갈 나이가 되었다. 사라가 127살을 살고 죽은 후에 이삭은 엄마 사라를 생각하면서 슬픈 날들을 보냈다. 이제 아브라함은 사라를 잃은 것에서 벗어나서 이삭을 짝지워 주기로 생각을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누구를 며느리로 맞아들일 것인가? 아브라함에게는 분명한 기준이 있었다. 아브라함의 기준은 이방여인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아브라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두 번째 조건이 있는데 우리집 며느리가 될 사람은 내가 걸어온 길을 걸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자기 고향땅에서 아들 이삭을 위해서 며느리를 맞기로 결정을 한다. 그런데 또 한가지 문제가 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떠나는 그 순간 여러 가지 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절대로 가나안을 떠나지 않으리라 그래서 독자 이삭의 신부감을 고르기 위해서 그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던 늙은 종을 보내기로 마음을 먹는다.
   아마도 아브라함이 생각할 때 이 늙은 종은 아브라함의 눈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 같다. 아브라함은 늙은 종을 불러서 이상한 맹세를 하는데 이 맹세가 엄청나게 특이하다. 아브라함은 늙은 종에서 네 손을 나의 다리 사이에 넣고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께 맹세라여 라 나의 아들의 아내가 될 여인을 이 가나안 사람의 딸들에게서 찾지 말고 나의 고향 나의 친척이 사는 곳으로 가서 가기에서 나의 아들 이삭의 아내 될 사람을 찾겠다고 맹세하여라"라고 말을 한다.
  신성한 계약식이 벌어진다. 그 신성한 계약식이라는 것은 늙은 아브라함의 다리 사이에 손을 넣고 맹세를 하는 것이다. 서약을 시키는 쪽에서 서약을 받는 사람의 손을 자기 다리 사리에 넣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늙을 대로 늙은 노인이지만 노쇠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25장에서 사라가 죽자 그두라라는 여자를 얻어서 장가를 또 든다. 그때가 몇 살 때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이삭이 장가를 든 다음이니까 145세는 족히 넘었을 것이다. 이삭이 장가드는 나이는 40이다. 아브라함의 나이는 140세 정도...그 나이이지만 아브라함은 아직도 노쇠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으니까 아직도 정정한 노인이다.
   아직 정정한 노인일 때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아내를 자신의 며느리를 들이고 싶었다. 그래서 이제 이삭장가들이기 프로젝트에 임한다.
  물론 아브라함은 하갈의 소생인 이스마엘을 통해서 며느리를 보았다. 그 며느리는 이집트 여자였다. 창세기 21장에 보면 이스마엘이 장가든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40이 되도록 장가를 못간 이삭을 볼 때 빨리 좋은 여자를 얻으려고 생각을 해서 믿음직한 늙은 종을 부른다.
   그리고 그에게 아주 지엄하게 명령을 내린다. "너의 손을 나의 다리 사이에 넣어라." "그리고 내 아들 이삭의 아내를 찾아오겠다고 맹세해라"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손을 다리사이에 넣는다는 것은 남자의 생식기를 잡고 맹세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볼 때 어이없는 광경이 벌어진다. 종 된 주제에 주인의 생식기에다 손을 대는 것이다. 아직도 정정하기 짝이 없는 아브라함의 상징에 손을 대고 거룩한 서약식을 한다.
   마치 미국 대통령이 성경책에 손을 얹고 서약을 하는 것처럼 우리나라 대통령이 헌법에 손을 대고 서약을 하는 것처럼 엄숙한 의식이 진행되는 순간이다. 서약식의 방법은 너무나 많이 있다. 손을 하늘에 대고 서약을 할 수도 있는데 하필 생식기를 붙잡고 서약을 한다. 이런 번거로운 의식을 행한다. 그런데 이 의식 자체는 상당히 신성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남성의 상징은 할례를 받은 사람의 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할례의 언약이다. 하나님과의 언약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할례를 받은 고통을 당한 사람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체험을 담보로 거는 서약이다.
  만약에 이 일이 잘못된다면 할례의 고통으로 보복을 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무언의 다짐이다. 언약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의 번성이다. 그러니까 후손의 번성을 일구어낼 상징에 손을 대는 행동이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인간이 실천하겠다는 서약의식이다. 이삭의 결혼은 이런 신성한 예식에 의해서 시작이 된다.
    이런 환도뼈 예식은 창세기 47장에도 보면 나온다. 창세기 47장 29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죽을 기한이 가까우매 그가 그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환도뼈 아래 넣어서 나를 인애와 성심으로 대접하여 애굽에 장사하지 않기를 맹세하고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선영에 장사하라 요셉이 가로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야곱이 애굽에서 죽을 때 죽기 전에 아들 요셉을 불러 놓고 환도뼈 서약식을 한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손을 나의 환도뼈 밑에 넣어라. 그리고 맹세를 해라. 내가 죽으면은 이 애굽 땅에다가 나를 묻지 말고 저기 저 가나안땅에, 나의 조상들이 묻힌 바로 그 장소에 나의 시신을 묻어다오. 나를 그 곳에 장사지내다오."
   그래서 아들 요셉이 아버지의 상징을 잡고 맹세를 하는 것이다. "아버님,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죽자 요셉은 아버지의 환도뼈 서약을 지키기 위해서 애굽에서 가나안 땅 까지 아버지의 시신을 가지고 장례식을 치른다. 야곱에게 있어서 환도뼈 서약을 할 만큼 중요한 일은 자신의 시신이 자신이 태어난 곳에 묻이는 것이었다. 오늘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사라가 죽은 후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일은 아들 이삭을 위해서 신부를 구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아들처럼 생각했던 종을 불러서 이런 신성한 서약식을 하는 것이다.
   결혼이라는 것이 이처럼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아무렇게나 진행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결혼의 중요성을 알았던 것 같다.
   물론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가 2000년의 자료이지만 이혼과 결혼에 관한 통계청의 보고에 의하면 일년동안 우리나라의 인구의 삼십삼만삼천쌍이 결혼을 했는데 그 가운데 122,000쌍이 이혼을 했다고 한다. 하루 평균 915명이 결혼을 하고 329명이 이혼을 한 셈이다. 이혼율이 37%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재판장이 이혼하기를 원하냐 라는 질문에 주저하지 않고 네 하고 대답을 하면 남남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도로남이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님이라는 글자에 점하나 붙으니까 남이 되듯이 갈라서는 것이다. 결혼은 줄고 이혼은 늘어나고 있다. 비혼 미혼 혼자사는 가정이 인천에서 20%가 넘는다고 하니까 가정 해체의 위기까지 오는 것은 아닌가?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
   오늘 24장에 나와 있는 말씀은 그래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를 맞이하는 신중함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엿볼 수 있는 본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브라함도 이삭의 결혼에 신중함을 보였지만 그의 종이었던 늙은 종도 엄청나게 신중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민감해질 수 있도로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물론 생식기 서약을 하지만 24장 12절에 보면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가 가로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전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그는 기도하면서 신부를 간택하는 이 중요한 일을 실수함 없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진행하는 신중함이 보인다.
   사람하나 잘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부산을 떤다. 그런데 당사자인 이삭도 24장 63절을 보면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약대들이 오더라"
당사자인 이삭도 묵상했다. 이삭도 기도했다. 아브라함도 신중한 서약식을 늙은종하고 하고 종은 또다시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삭도 자신의 신부감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결혼문제를 놓고 가족 전체가 이 일에 중요성을 깨닫고 기도에 매달린다.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눈에 보이는 것으로 결정하지 아니하도록, 즉흥적인 감정으로 이런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지 아니하도록 그래서 실패하는 인생을 살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에 있어서 조건들이 있는데 아브라함의 조건은 아주 단순하다. 두 가지 분명한 원칙이 있다. 어떠한 경우라도 가나안 여인을 며느리로 맞아들이지 않겠다. 두 번째는 내가 가나안 땅을 떠나지 않겠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신앙적인 원칙 때문에 아브라함이 며느리를 고르는데 정말 쉽지 않았다. 이삭이 어떤 아들인가? 100세에 낳은 아들이다. 자기가 직접 눈으로 보고 며느리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되는데 우리도 무슨 일을 하든지 바른 기준이 있어야 한다. 물론 그 기준이 잘못되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지만 분명한 기준을 세워 놓자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살아오면서 이렇게 세워진 삶의 원칙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하루아침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온갖 실패와 고생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깨닫게 된 후에 이렇게 내가 살아야 하는구나를 깨닫게 되고 난 후에 세워진 원칙이다.
   아브라함의 소시적에는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을 벗어나서 자신의 생각에 애굽으로도 가보고 그랄 땅으로도 가보기도 했다. 그래서 거기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삶의 원칙을 이탈해 가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얼마나 창피한 일을 당하게 되었는가? 이렇게 실패한 삶을 살고 좌절을 겪은 후에야 삶의 원칙을 벗어난 삶을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우리 역시 삶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 다니엘 역시 삶의 원칙이 있었다. 그 삶의 원칙은 법이 어떻든지 간에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이스라엘을 향해서 세 번 기도했다는 것이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 원칙을 지키면서 사니까 사자굴에 들어가서도 살아 남는 체험을 하게 된다.
   변하지 않는 삶의 원칙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 삶의 매뉴얼이 무엇인가? 물건을 사더라도 매뉴얼이 있다. 그 매뉴얼대로만 살면 엄청나게 풍부한 삶을 살게 되어 있는데 그것 다 제대로 지키고 살 수 있는가? 그런데 많이 알면 알수록 정말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는 꺽을 수 없는 고집이 있었는데 그것은 며느리를 고향 땅에서 얻는 것이다. 그런데 고향 땅에서 며느리를 얻으려면 가나안을 떠나서 고향땅으로 이삭의 신부감을 구하러 가야 하는데 가나안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신뢰하는 종을 거룩한 서약식을 한 다음에 보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으로 오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고향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이 만나는 곳 두 강의 하류 지점에 위치한 땅이다. 비옥한 초생달 지역으로서 페르시아 만하고 연결되어 있는 아주 비옥한 땅이 그의 고향이다. 현재는 이라크 땅이고 고대문명의 발생지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생한 곳이다. 이곳을 떠나서 현재의 팔레스타인까지 긴 거리를 여행한다. 아브라함의 일생은 나그네 인생이었다. 갈바를 알지 못한채 떠돌이 생활을 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며느리를 뽑는 기준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걸을 수 있는 여자를 뽑기를 원했다. 미모에 대한 언급이 없다. 눈이 어떻고 코가 어떻고 이런 기준은 없다. 내가 걸어 온 험악한 길을 걸어 올 수 있는 여자를 며느리 감으로 원했던 것 같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며느리의 자격 조건이다.
   신부감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결혼관 역시 어떤 기준으로 결혼조건을 삶아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신부라는 말의 뜻은 히브리어로 완정자 완전한 자라를 것으로 여성에게 있어서 혼인은 완성과 성숙으로 볼 수 있다. 육체적인 성숙이 반드시 영적인 성숙은 아니기 때문에 영적인 성숙과 육적인 성숙에 대한 완성도를 의미한다.
   조지 H. 헤이스는 배우자 선택의 기준이 있는데 (1)공통의 신앙 (2)감정의 성숙이다. 강점의 성숙이라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나 자신을 먼저 용납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며 대부분 다른 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지낼 수 있을 만큼의 성장한 단계를 의미한다.  
   결혼으로 팔자를 펴야 하겟다고 그래서 신데렐라 콤플렉스 같은 것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남편 잘 만나 팔자 고치려 한다는 생각이나.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나서 내 볼에 키스해주고 가지는 안을까 하는 것이다. 신데렐라에서 왕비가 되는 것이다. 원래 신데렐라라는 뜻은 재를 뒤집어쓴이라는 것이다. 재를 뒤집어쓴 부엌떼기가 유리구두 하나 신고 왕비가 되는 것 아닌가? 자신의 자라온 환경에서 부족한 것을 왕자님이 나타나 일시에 해결해 줄 것이라 기대한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여자들이 자기 카드빚을 갚아 줄 수 있는 남자에게 자신의 몸을 팔 듯이 결혼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정말 큰 문제이다. 그래서 결혼하는데 어떤 성을 가진 남자가 인기가 있는 줄 아는가? '전씨'씨가 제일 인기가 있다고 한다. 돈 전짜이다.
   그리고 요즘 여자들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제일 인기가 있다고 한다. 돈키호테 신랑감이다. 돈, 돈 많고. 키, 키크고. 호, 호남형이고, 테, 테크닉이 좋은 남자 모두가 외적인 것에 기준을 둔 것이다. 고운것도 거짖되고 아름다운 것도 모두가 다 헛되다. 바른 판단력, 영적 판단력을 가지고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중대한 결정을 위해서 아브라함의 온 가족들이 덤벼드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한 서약식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선택된다. 이 늙은 종이 우리는 15장에 나오는 엘리멜렉이라고 생각을 한다.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이가 없었을 때 하나님께 원망을 하면서 아이 달라고 하면서 내 상속을 무를 아이가 없으니 다메섹에서 함께 온 엘리멜렉을 내 상속자로 세우겠다고 하나님께 말한 그 종이다. 오늘 본문에는 그 사람 이름이 익명으로 나오고 있지만 이 사람이 정말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집안의 나이든 종으로서 아브라함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이다. 24;2절에 보면 그의 신상 명세서가 나오지 않는가? 충실한 집사였다. 이런 믿음직한 집사에게 아브라함은 자기의 상징을 잡고 이삭의 아내를 데리고 오라고 맹세하게 한다.
   아브라함의 마음에 정말 합한 사람이었기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마음에 합한 것은 그 사람에게 길들여지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길들임을 스스로 당하는 것이다. 개처럼 길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좋아서 그 사람과 함께 공유할 것이 많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을 한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따라 좋아하는 것이다. 내 취향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처럼 되어져 가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8장 1절에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는 말씀이 있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우상제물에게 받쳐진 제물을 먹을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지식을 가지고 자기들이 자유롭게 한다.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행동해서 다른 사람이 실족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안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취향에 맞추는 것이다. 엘리멜렉은 너무나 잘 알았다.  
   자신의 판단대로 살지 않은 것 같다. 주인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았다. 행 13;22절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왜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았는가? 다윗의 집은 대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똑똑하지도 않고 우리의 판단이 하나님보다 더 낫 지도 않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기 이전에 이제까지 내 판단대로 살아왔다. 내 잘 도는 머리, 내 좋은 판단, 나의 종합적인 분석, 그것 가지고 살아 왔다. 그러니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지 못했다.
   다 알고 가는 것은 없지만 가다 보니까 알게 되더라는 것이다. 엘리멜렉도 누가 신부감이 될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기도하고 가다보니까 이 여자가 이삭의 아내라는 것을 알게 되더라는 것이다. 우리 인생 가운데 확실하게 다 알고 가는 것이 얼마나 있는가? 결혼생활이 뭔지 알고 결혼했는가? 직장생활이 뭔지 알고 직장생활을 했는가?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갈 때 뭔지 알고 갔는가? 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대개 믿고 가는 것이다.
   말씀을 정리하겠다. 아브라함은 결혼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이 신뢰하는 종과 엄숙한 서약식을 통해서 아들의 신부감을 고른다. 신부감을 고르는 아브라함의 조건은 자신의 고향을 떠나 여기까지 여행을 오는 것이다. 고향땅을 엑소더스 할 수 있는 신앙인을 찾고 있다.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을 뒤로 한 채 "갈바를 알지 못한 채"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리어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을 향해 가는 나그네길을 걷기 원했다. 지금까지의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자기를 내어 맡기겠다는 결단의 길이었다. 그길을 오면서 옛 아브라함이 죽고 새 아브라함으로 다시 태어났듯이 사랑하는 아들 이삭의 배필로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찾는 믿음으로 사는 여인을 찾고 있었다.
   이런 삶의 원칙을 우리가 가지고 살자. 이런 삶의 원칙은 일순간에 얻어진 것이 아니다. 긴 시간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다. 결혼에 대한 신성함을 우리가 바로 깨닫고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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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갈라디아서 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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