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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일(2005-09-27 07:13:51, Hit : 2790, Vote : 496
 성공은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다.


성공은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다.
사 42:5-9 /43:18-21                               (2005. 9. 25 주일 오전 9시)
    요즘 KBS에서 징키스칸이라는 드라마를 한다.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어서 한번도 보지 못했는데 나는 징키스칸에 관한 책을 근래에 두권을 읽었다. 징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다라는 책인다. 그책 앞부분에 이런 말이 있다. “징키스칸은 한 자리에 눌러 앉아 백성을 다스리는데 관심이 없었다. 물자와 사람이 돌아 다닐 수 있는 길을 뚫고 이은 다음 그 흐름의 방향만 통제하면 그만이었다. 이렇게 뚫린 길을 통해 당대 최고의 인류 문명이 변방 유럽까지 흘러 가게 되었다. 몽골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유럽사람을 깨웠다는 말이다. 몽골군은 2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로마군이 400년동안 정복한 것보다 더 많은 땅과 사람을 정복했다. 그는 아프리카 대륙만한 크기의 대륙을 점령했으며 현대 지도에서 징키스칸이 정복한 땅은 30개국이고 인구로는 30억 인구가 넘는다.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곳을 점령했다. 세계의 반을 점령했다.
   어떻게 그가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었을까? 그는 유목민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유목민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자유함이다. 폐쇠된 생각이 없다. 담을 쌓지 않는 생각이다. 어려서 아버지가 독살 당하고 노예로 팔려 가고 아내마저 약탈당했던 불행하고 힘이 없는 징키스칸이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 할 수 있었던 것은 전투 때 마다 바뀌는 전술과 무기 그리고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서 나간 사람이다. 성을 쌓지 말자 교류하자는 것이다. 두려운 사람들은 성을 쌓는다. 남들이 들어오는 것을 겁을 낸다. 만리장성을 쌓았던 진시황은 북쪽의 흉노가 두려웠다. 강한자는 절대로 성을 쌓지 않는다. 닫힌 공간에 살면 위대한 일을 할 수 없다.
   오늘 제목은 위대한 생각은 위대한 일을 한다는 것이다. 마음속에서부터 할 수 있다는 자유함을 가지자 생각부터 닫힌 생각하지 말자. 마음속에 품지 않은 복은 절대로 현실로 나타나지 않는다. 마음으로 믿지 않으면 절대로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나는 안돼’라고 말하는 내 마음속의 적과 싸워야 한다. ‘난 이미 막다른 골목에 왔어’ ‘이게 내 한계야’ ‘내가 그렇지 뭐’ ‘나 같은 것이 어떻게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지?’ ‘나는 글렀어’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글러 먹은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 잠재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먼저 큰 비전을 품어야 한다. 최선의 삶을 살려면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마음에 품는다는 것은 마음속에 원하는 삶의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멈추지 말고 위대한 그림을 한번 그려보자는 것이다. 패배와 실패의 이미지를 그리는 사람은 실패자의 인생을 살게 된다. 그러나 승리와 성공, 건강, 풍요로움, 기쁨, 평화, 행복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은 아무리 큰 장애물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런 인생을 살게 된다.
   우리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는 고정관념에 사로 잡혀 허우적대지 말자. 믿음을 나래를 활짝 펴고 더 큰 미래를 바라보자. 도대체 누가 이런 부정적인 사탄의 속삭임을 쳐부술 수 있는가? ‘지금 하지마’, ‘나중에 해’, ‘지금 피곤하니까 교회는 다음주에 가’ ‘힘들지’, ‘새벽기도는 뭐하러 가니? 좀만 더 자...’ 이런 나쁜 속삭임들을 다 몰아내야 한다. 꿀맛 같은 휴식을 거부하고 기도라는 고투에 몰두할 사람이 누구인가? 재미있는 게임 때문에 그것 몇 시간 더 하느라고 내 비전이 문 앞에서 좌절됨을 맛보아야 겠는가?
    바울이 빌립보서를 쓸때 옥중에서 자유롭지 못한 가운데 편지를 썼다. 그런데 바울은 밖에서 자유를 만끽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이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좋은 것 생각하라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 뒷 절에 보면 생각에 머무는 인생은 위대한 일을 할 수 없고 행동하는 인생이 되라는 것이다. 이렇게 좋은 것들을 생각했으면 9절에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항상 함께 계시리라”
   예레미야 6장 9절에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 좋지 못한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망하는 것이다. 우리가 좋은 생각을 했으면 갈등하지 말자. 확신가운데 살자.
   좁은 태도와 생각으로는 폭넓은 삶을 살 수 없다. 위대한 삶을 살 수 없다. 안 된다는 생각만을 가지고 있으면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복을 받을 수 없다. 그런 어리석은 태도는 복의 흐름을 막는다. 위대함으로 가는 발을 묶는다.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자.
   만수동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어....강남에서나 나오지 아니다. 나는 우리 교회에 비젼을 가지고 있다. 비록 지금 내 은행의 잔고가 아무것도 없을 지라도...비록 지금은 불가능해 보인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의 그림의 떡은 없다.
   우리들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을 해야 한다. “너희는 아빠보다 더 멋진 삶을 살게 될 거야 너희는 잠재력이 많아 꼭 위대한 일을 할꺼야” 아이들에게 허황된 꿈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비젼을 심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밭에 끊임없이 새로운 씨앗을 뿌리고 계신다. 우리 맘속에 낡아 빠진 생각을 뽑아내고 창조적인 생각의 씨앗을 뿌리고 계신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던 사람이었다. 출애굽기 3장 4장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소명에 자신이 없다고 뒤로 물러난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를 위대한 지도자로 사용한 후에 신 34장에 보니까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모세는 하나님이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모세의 능력은 하나님과 사귀었을 때 생겨난 능력이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은 절대로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다.
   10명의 정탐군들은 할 수 없다고 한다. 민수기 13장 32절에 그 땅을 탐지하고 악평하면서 말하기를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들과 비교했을때 메뚜기와 같다’고 자신에게 거는 기대 수준을 낮추어 버린다. 그렇게 악평하고 자신의 기대가치를 낮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민 14:37절에 악평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다. 이것이 그들의 결과이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올라가자’. ‘취하자’, ‘능히 이길 것이다’. ‘아름다운 땅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그들의 신은 그들에게서 떠났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얼마나 멋진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사람들이 실패하면 주눅이 든다. 사도행전 26장:28, 29절에 보면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이 자신있게 증거를 한다.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네가 나에게 예수를 믿게 만들려고 하느냐 그러니까 바울이 대답하기를 내가 결박 당한것만 빼고는 사람들이 다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라고 대답을 한다. 기막힌 이야기이다.
    우리의 기대 수준을 높였으면 좋겠다.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찾지 말라. 강점을 극대화 하면 된다. 우리 교회를 생각하면서 불길 부흥을 체험 할꺼야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삼류 인생을 살 것이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희망찬 말로 하루를 시작해라 “오늘은 멋진 날이 될꺼야 하나님이 내 발걸음을 인도해 주실거야.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감싸고 있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고 있어 오늘은 정말 기대가 되는 날인데” 믿음과 기대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히브리서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다. 소망의 또 다른 이름은 ‘높은 기대’이다. 아침에 눈을 뜨지 마자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해야만 한다.
    우리의 모든 삶의 출발은 하나님부터 출발해야 한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삶을 살자.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움에 빠졌을 때마다 항상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반복한다. 시편을 보라 어려움과 고난이 있을 때마다 우리의 창조주가 누구인지, 창조에 관한 찬송이 나온다. 왜 사람이 이렇게 심각한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묵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한 집착이 아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되는 일도 있고 안되는 일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고 ‘언제 되나, 언제 이루어지나’ 이러고 있으면 시간 되게 안간다. 시간 빨리 가게 하는 방법은 어떤 사명을 놓고 꾸준히 진행하면서 잊어버리는 것이다. 잊어버리고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에 집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내게 주어진 일들에 충성하면 어느 순간에 시간이 금방 가버린다. 군대에서도 제대 날짜 세고 있으면 시간이 안간다. 신경 쓰지 않고 그날그날 살다 보면 벌써 제대했네 그럴 때가 많이 있다.
  매사가 다 그런것 같다. 집착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들을 놓고 계속 진행하면서 자기 일 가운데 열심히 하다 보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초월의 능력이다. 이제까지 집착해서 되는 일 보았는가?
   안 되는 것만 바라보지 말라. 몽골사람들 시력이 좋은데 보통 사람의 시력이 2.9이고 시력이 아주 좋은 사람이 7.0이라고 한다. 그 사람들이 눈이 좋은 이유는 넓은 초원에서 멀리 바라보는 생활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눈이 피로하면 눈을 감고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눈을 쉬게 만드는 방법은 녹색을 많이 바라보든지 멀리 바라볼 때 눈이 쉬는 것이다. 눈이 너무 피로할 때에는 먼 곳을 바라보아야 한다. 눈을 감고 있어서 피로가 풀린다면 잠 많이 자는 사람들은 다 시력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많이 잔다고 시력이 좋아지는가?
   시편 121편 1절을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눈을 든다는 말이 무엇인가?  멀리 바라보는 것이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부터 온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 바라보고서 깨닫는 것이 무엇인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는 여기에 참된 쉼이 있는 것이다.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제한을 한계를 극복하는 사명이 있다. 6절을 보면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라. 빛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변방을 향해서 나가고 유대라는 한계를 뛰어넘고 사마리아라는 한계를 뛰어 넘고 또 다른 세계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한계를 뛰어넘는 것, 그것이 예수의 영의 특징이다.  
  오늘 본문의 7절을 보면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소경, 시각적인 한계의 제한을 받는 사람이다. 갇힌 자, 공간적인 한계의 제한을 받는 사람이다. 흑암, 영적인 한계가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한계를 뛰어넘고 제한을 뛰어넘는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는 뜻이다. 틀을 깨자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는 어떤 교회였는가? 제도권 안에 있는 안정적인 교회였다. 변방성이 없는 교회였다. 전부 유대인만 모인 교회였다. 큰 교회였다. 오순절에 설교를 했더니 3000명이 믿고 그 다음에 했더니 5000명이 믿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약점이 무엇인가? 자기 울타리에 갇혀서 살았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는 어떤 교회 였는가? 선을 넘는 교회였다. 사도행전 11장 20절을 보니까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루살렘교회에는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증거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제한성이 있었는데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마구 넘어 간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헬라인들에게도 전해 보았다. 그랬더니 그들도 믿더라는 것이다. ‘아! 하나님께서는 헬라인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구나!’ 이것이 교회의 능력이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 이건 절대로 안돼 하면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자꾸 해보아야 한다. 부딛쳐 보아야 한다. 시도해보아야 한다. 성령이 우리를 어디로 나아가게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을 보라. 사도바울이 했던 일마다 다 성공했는가? 드로아에서 사도 바울이 갈바를 몰라 헤메고 있었다. 예수의 영이 막고 성령이 막고 못 가게 했다. 이쪽으로 가려면 여기 막고 저쪽으로 가려면 저기 막히고 맴돌고 있었는데 그가 마게도니아의 환상을 본다. 그리고 유럽으로 가지 않았는가? 유럽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계기는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보면서 자꾸 시도한 것이다.
   자기의 달란트를 사용해 보지도 않고 땅속에 파 묻어 버리는 것은 죄이다. 우리 가운데 은사를 많이 받은 사람도 있고 적게 받은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은사가 100이고 어떤 사람은 은사가 10밖에 없다. 그러면 다른 사람의 10%밖에 받지 못했던 사람이 100%의 은사 받은 사람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똑같아지는 방법이 무엇일까? 100이라는 은사 받은 사람의 10배를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똑같아지는 것이다. 아예 12배를 하면 능가하는 것이다. 넉넉히 20배쯤 해버리면 확실히 이기는 것이다. 예수의 영은 시도하게 하는 것이다. 다락방에 앉아 있었던 사람들을 움직인 것은 성령이다. 성령이 그들을 다락방에서 밖으로 내보낸 것이다. 성령이 그들을 시장 바닥에 서게 한 것이다. 성령이 그들을 외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한다.
   바리새인의 약점은 줄 긋는 약점이 있었다. 여기 넘어서면 절대로 완대 너는 죄인이니까 우리와 함께 할 수 없다. 넘어 오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계속 넘어갔다. 복음의 능력은 선을 넘는 능력이고 한계를 넘는 능력이다. 제한된 것을 뛰어넘어 위대한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장애는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한 자극일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확장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밤낮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 선 그어놓고 유대인들만 되고 소경은 안 되고, 너는 의인이다 너는 죄인이다 밤낮 선 긋는 작업이었다. 여기는 이방인의 뜰. 여기는 여인의 뜰. 여기는 안돼. 이것은 안식일에 해도 되는 일, 이것은 아니고…… 다 선 긋는 것 아니었는가?
   43장 18절에 보면 이전것 기억하지 말며 옛적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다.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경험 했는지 중요하지 않다. 오늘은 새로운 날이다. 과거의 잣대로 미래를 판단하지 말자. 과거에 나는 못했으니까 실패했으니까 미래에도 안될꺼야 하는 죽은 생각은 위대한 일을 하지 못한다.
   이제 위대한 일을 한번 해 보자. 돈이 한푼 없어도 뛰는 것이다. 돈이 없어서 못한다고 하지 말자. 어린아이가 성인병에 걸렸다. 왜 인가? 한창 뛰어야 할 나이에 뛰지 않는 것이다.  이제 열정 속에서 매일 아침을 맞이하고 기대와 설레임으로 하루를 살자 오늘은 기대되는 새로운 날이다. 마음의 나침반을 올바른 방향에 맞추자. 하나님 때문에 돋보이는 삶을 살자 그래서 아브라함처럼 복을 나누어 주는 삶을 살자. 우리 함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위대한 일군이 되기를 바란다.





멀리 바라보며 행동하는 신앙
냉수 한잔의 친절(창세기 24장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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