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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일(2009-03-04 17:00:05, Hit : 2107, Vote : 511
 멀리 바라보며 행동하는 신앙


멀리 바라보며 행동하는 신앙
창세기 22장 1-12                         (2009년 3월 1일 주일 오전 9시 오후 2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역사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당한다. 가는 곳 마다 어려움이 있었다. 그중에 부인 사라가 아들을 낳지 못해서 그것이 늘 마음속에 그늘이 되었다. 순간 순간 위기도 있었지만 아브라함의 삶은 모든 것들을 은혜로 마감하고 결국 해미 엔딩으로 끝이 난다. 하나님이 처음 그를 부르셨을 때의 약속처럼 모든 열국의 아버지가 되고 복의 근원이 되었다. 결국 그의 삶 가운데 고난이 유익이 되었다는 말이다. 시련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소망을 낳는다는 말이다. 결국 수가 다하여 그 열조에게 돌아갔다. 그 시련은 위기에서 구출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드러내었다. 시련 가운데서도 슬픔의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탄식하지도 넋두리 하지도 않았다. 신앙인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모두 병을 앓는다. 파산과 실패의 쓰라림을 맛본다. 그러나 투병 중에 내 밭은 고백은 신앙인과 비 신앙인과는 다르다.
   그래서 나는 희망을 이야기 하고 싶다. 삼일절 기념 예배이다. 1919년 3월 1일 수많은 교회들이 자유를 부르짖으며 만세를 불렀다. 우리나라는 1910년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 빼앗겼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 지내왔는가? 민족의 고난 속에 있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당시에 희망이었다. 나는 지금 경제 위기가 100년 만에 찾아 왔다고 하지만 나는 지금 우리가 희망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세계는 1914년에 시작된 제 1차 세계 대전이 1918년 11월에 끝이 났다. 이 전쟁으로 인해 독일에게 무너진 제정 러시아는 1917년 10월 10월 혁명에 의해서 무너지고 레닌이 이끄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국가가 등장을 했고 1916년 미국이 이 대전에 참여해서 승리를 함으로 미국의 발언권이 커지게 되었다. 종전을 내다 본 미국의 대통령 윌슨은 평화 원칙 14개 조항을 제출하면서 민족 자결론을 들어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가 결정한다는 것이며 어떠한 민족이든지 그 민족의 의사에 따라 독립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원칙으로 강대국에 소속되어 있던 많은 나라들이 독립을 했다. 폴란드 체코 헝가리 유고슬리비아 가 독립을 했고 이런 원칙에 의해서 민족 독립의 기운은 세계의 식민지나 종속국으로 있는 민족들에게 결정적인 독립의지를 불어 넣어 주었다.
   우리나라도 이런 영향으로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는데 교회 안에서 민족 운동이 일어났다. 전인적인 인간 구원을 향한 선교의 일환으로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고 독립을 이루려는 민족 운동이다. 민족 운동을 이끌었던 감리교는 성령체험을 통해서 이기적인 자아를 떠나 겨레를 내 몸같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국 민족 운동에 나섰다. 손정도 목사는 “우리는 이와 같이 악하고 어두운 세계를 철창으로 질그릇 부스러뜨리듯이 하고 평화의 세계 즉 사랑의 세계를 짓고자 하노라”  믿음은 생명이니 믿음이 확실한 자는 생명이 있고 믿음이 없는 자는 생명도 없나니 생명이 있는 자 능히 사람을 살리고 생명이 없는 자는 자기도 살릴 수 없는 것이라“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써 우리 사회와 민족을 구하려고 했다. 이필주 목사는 구렁이를 잡아 오른손에 가지고 있던 칼로 그놈을 토막 토막 잘라버리는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꾼 후에 독립 운동을 통해 사탄을 물리치는 운동에 뛰어 들었다.
  민족 대표 33인 중에 기독교인 16명이었고 우리 감리교인은 그중에 10명이었다. 교회는 민족이 고난당할 때마다 대안을 제시했다. 한국 교회는 애굽의 압제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낸 모세나 고향 땅에 큰 어려움을 당하는 민족의 소식을 듣고 성벽 재건에 나선 느헤미야나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민족을 구하기 위해 왕 앞에 나선 에스더처럼 일제의 탄 압 속에서 불길 같이 일어났다.
삼일 운동 이후 만세 운동을 하다가 기소된 피고인들을 종교별 통계로 보면 기독교인이 불교 1% 유교 0.1 % 천도교가 18% 그리고 기독교가 24.3%가 된다. 당시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1.3%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모든 민족 운동을 이끌어 가는 대안으로서 기독교가 영향력을 미쳤다. 그 어려운 시기에도 기독교와 교회는 민족의 희망이었다. 기독교인들은 1차 세계 대전 후 세계정세를 정확히 읽고 바른 시대 의식을 가졌기 때문에 삼일 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늘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희망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믿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멀리 바라보면 행동하는 믿음을 가지면 결국에는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22장의 말씀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어려운 시험을 만나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의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데리고 오라 그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라 내가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라는 말씀을 듣는다. 하나님의 명령은 아주 단호하다. 이삭이 보통 아들인가?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의 이름이 이삭인 것은 그가 그만큼 자기 어머니 사라에게 웃음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아기를 낳지 못하다가 낳았다. 얼마나 애지중지 하게 이 아이를 생각했겠는가? 이런 이삭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한다. 번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통째로 불에 태우는 제물이다. 아들을 통째로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이다. 인격적인 하나님이 이런 비인격적인 명령을 주실 수 있을까 하면서 따질 수 있었다. 이삭에게 걸었던 희망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다. 이삭을 두고 얼마나 하나님이 자주 약속을 하셨는가? 이런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말씀에 아브라함은 아무 말이 없다. 긍정도 부정도 없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이런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대처해야 극복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1)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 마음이 동요 되지 않았다. 어떤 순간에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신앙이 정말 좋은 신앙이다. 이런 어마 어마한 말도 안 되는 명령에 동요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잘하고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잘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베드로가 감옥에 갇힌 이야기가 나온다. 같이 갇혀 있던 야고보가 먼저 헤롯에게 목 베임을 당했다. 이제 명절만 지나면 베드로 차례이다. 사형수로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잠이 오겠는가? 그런데 깊은 잠에 들었다. 깊은 잠에 들었다는 것은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왜 사람들이 두려운 마음을 가지는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지금 얼마나 불안한가? 자녀를 봐도 불안하고 직장을 생각해도 불안하고 그래서 지옥 같은 삶을 산다. 염려하게 만들고 결국 낙심하게 만든다. 특별히 경제적인 위기가 괴롭힌다. 돈이 없다. 그래서 힘들다. 염려하고 낙심하게 만든다. 나에게 이럴 수가 있어 하면서 평소대로 살지 못한다. 결국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직장 안에서는 언제 무너질지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링컨이 애용하던 성경이 워싱턴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성경 속에 손때에 이겨져 눌린 손가락 자국이 있는데 그 손자국은 여러번 같은 장소를 손가락으로 눌러서 생긴 자국이다. 시편 34편 5절에 “주님을 찾았더니 내게 응답하시고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라는 말씀이 있다. 링컨은 남북전쟁 등 평생에 걸친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은 반드시 대답해 주신다는 확신과 모든 두려움에서 건져 주신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는 손자국이 나도록 같은 시편 구절을 되풀이 해 읽으면서 노예제도 폐지라는 위업을 이루었던 것이다.
  성경에는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하느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가 있다. 가나안 땅에 거의 도착했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일러 그 새로운 땅을 정찰한 사람들을 본낸다. 40일 만에 돌아온 정찰대의 보고가 서로 달랐다. 정찰대 열 두명 가운데 열 명의 보고를 들어 보자 “우리는 그곳에서 아낙 자손들을 보았다. 우리 눈에도 우리 자신이 메뚜기 같았지만 그들의 눈에도 그랬을 것이다.” 거인족 앞에 메뚜기처럼 보여서 두려움에 사로 잡혔다.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반대의 보고를 한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저 땅의 백성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이제 우리의 밥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같은 환경이지만 보고가 달랐다.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다른 것이다. 거인 골리앗이 소년 다윗에게 패했다. 골리앗은 자신을 대적하러 나온 다윗이 겨우 막대기와 장돌 들고 나온 것에 대해서 자존심이 상했다. 어이가 없어서 그는 삼장 17장 43절에 “막대기를 들고 나오다니 내가 개란 말이냐”라는 말이 있다. 흥분한 골리앗은 자신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던 개의 자아상을 뱉어 버렸다. 이 순간 골리앗은 장수가 아니라 개가 된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었기에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를 거슬러 둘러선 수 많은 무리 앞에서도 나는 두려워 하지 않으리 “ (시 3:7절) 다윗은 환경이 어려워도 승리를 확신 했다. 그의 확신은 현실이 되었다.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두려워한다. 그런데 공중의 새로 들에 핀 백합화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에 더욱 집중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더 어려운 시절도 지나왔다. 동요하지 말자 그리고 믿음으로 이겨내자. 지금은 더 많이 사랑해야 할 때이다. 내 남편 더 많이 사랑하고 내 아내 더 많이 사랑하고 내 자식 그리고 소외된 이웃들을 더 많이 사랑해야 한다. 두려움을 이기는 길은 결국 사랑이라는 것이다. 말 배우는 아이가 틀리면 안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평생 말 못하는 벙어리로 산다. 그러나 틀려도 된다는 용납해줄 것이라는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성장한다.
   누가복음 10장에 예수님 발 아래서 말씀에 집중한 마리아는 칭찬을 듣고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서 마음이 분주했다. 말씀 듣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뭔가를 해야만 칭찬을 받는 다는 율법적인 신앙에 빠져 있는 사람은 늘 불안한가. 사랑의 확신이 없으면 불안한 것이다. 무엇인가 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있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다.
   아브라함이 평소처럼 일찍 일어났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동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 환경에 따라서 우리의 믿음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힘들때나 어려울때나 혹은 편안할 때에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우리나라는 경제가 어려워서 어려운게 아니다. 경제는 예전에가 더 어려웠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지배 할 때는 얼마나 더 어려웠겠는가? 농사를 지어 놓으면 다 가지고 가고 있는 땅도 빼앗겼다. 그리고 6.25 전쟁 이후에는 또 얼마나 어려웠는가? 보릿고개라는 것이 있었다. 우리 아버지 세대는 칡뿌리로 연명을 했다. 휴지가 화장실에 없어서 대충 닦고 살았다. 우리 교회에는 비데도 놓지 않았는가?
   뭐가 우리를 지금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가? 교회가 자본주의 논리에 매여 있어서 경제가 무너지면 교회도 무너진다고 생각을 한다. 돈이 많고 적음으로 교회가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생각이 문제이다. 교회도 이 세상 안에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경제 논리에 의해서 휘청거릴 수 있다. 헌금이 많이 들어오면 교회가 든든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를 이루는 것은 성도들의 기도이다. 믿음으로 고백한 베드로의 신앙 고백위에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흔들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을 했다. 기도하는 교인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교회는 부흥하게 되어 있다. 경제적인 논리를 가지고 이야기 하지 말자. 요즘 가정이 무너지는 것도 자본주의 논리로 가정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돈 때문에 너하고 못살겠다고 하면서 무너지는 것이다. 돈이 가정을 이루는 기초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경제학자들이 좋은 이론을 내놓아도 일으켜 세울 수 없다 구호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거, 돈으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는 거, 일자리 만든다고 해결이 안 된다는 거, 생각을 달리 하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
   그래서 교회를 받치고 있는 기초는 재정이 아니다. 가정을 밭치는 것은 두툼한 월급 봉투가 아니다. 믿음이다. 그리고 사랑과 신뢰이다. ‘더 가지려고 하지 않기’ 지금 있는 걸로 행복해 하기 그런데 이것 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너무 잡는 버릇에 길들여졌고 남을 꺾는데 익숙하고 이겨야 산다는 것에 길들여져 있으니까 어려운 일이다. 세상이 늘 염려 가운데 있는 것은 지금 현재도 지구에 있는 자원을 골고루 나눠 먹기만 하면 하나도 굶어 죽지 않는다. 어떤 놈이 독점하니까 기아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다 뒤집혀서 배가 가라앉는데 다 죽게 되었다. 그런데 구명정이 하나밖에 없다. 하나는 죽을 수 밖에 없다. 동물의 원리는 미안하지만 너가 죽어라, 이것이 동물법칙이다. 그러나 사람은 안 그럴 수 있어요. 너 살아라, 내가 갈게. 자기가 죽고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원리가 기독교의 원리이다. 남이 죽든 말든 나부터 먹고 보자, 이건 동물이지요. 정글의 법칙이다. 우리가 왜 전도를 하는가? 교회가 커지기 위해서 전도하는가? 그러면 하지 말아라 예수 닮는 사람 만들기 위해서 전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 닮은 사람들이 많아지면 분명 세상은 변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메가 처어치가 아니라 메타 처어치가 되는 것이 우리 교회의 꿈 아닌가? 단순히 대형 교회 혹은 초대형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 닮은 사람들이 많은 교회 그래서 조금씩 세상이 바뀔 것 아닌가? 교회 안에서는 믿습니다 아멘을 하지만 밖에 나가면 예수님처럼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입술은 은혜스러운것 같지만 실상은 기독교인처럼 살지 못한다. 이제는 동요하지 말자  
(2)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번제에 쓸 나무를 준비한다. 예배를 준비하는 신앙이 필요하다. 찬양으로 준비하고 감사로 준비하고 마음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예배를 잘 준비하는 신앙이 중요하다. 왕상 18장에 보면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는 엘리야 이야기가 나온다. 갈멜산 꼭대기로 많은 사람들이 올라간다.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지가 올라가고 다른 쪽에는 초라한 옷차림의 엘리야가 올라간다. 그들이 시합을 시작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을 한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 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백성들의 우유부단함을 꾸짖는다. 자 너희들이 결정을 내리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영적 담장에 양발을 걸치고 그대로 있고 싶어 한다. 하나님을 믿지만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이 영적인 전쟁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 850명이 송아지를 잡고 불렀지만 불로 응답하지 않았다. 이제 엘리야 차례이다. 백성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한다. 그리고 엘리야는 명령을 한다. 먼저 그는 이스라엘 각 지파의 사람들을 뽑아 자기를 도와 하나님께 드릴 제단을 만들도록 했다. 그 다음 나무를 정렬하고 희생으로 드릴 소의 각을 떠서 그것들을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희생제물과 제단을 준비하고 구축했다. 무너진 제단을 수축할 때 불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래서 예배에 마음도 물질도 옷차림도 잘 준비를 해야 한다. 특별히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결국 이 말씀 속에 ‘여호와 이레’ 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온다. 준비하시는 하나님이다. 결국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고 예배가 회복되는 것이 중요하다.
   왕상 4장에 보면 엘리사의 제자 하나가 빚을 남기고 죽었다. 그래서 그 아내가 엘리사에게 부탁을 한다. 큰 고민이 생긴것이다. 2-5절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 저가 가로되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라 빈 그릇을 빌되 조금 빌지 말고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 저가 가로되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라 빈 그릇을 빌되 조금 빌지 말고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여인이 물러가서 그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저희는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 오고 그는 부었더니>
   이 여인은 엘리사가 하라는 데로 했다.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려 와라 그런데 그릇을 빌려 오되 조금 빌려 오지 말고 많이 빌려 오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릇이 준비되는 만큼 채워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준비는 하지 않고 채워주시기만을 바란다. 하나님은 준비된 자를 적당한 곳에 사용하신다. 어느 순간인가 우리가 그릇을 준비하는 것을 다 놓쳐버렸다. 사람들마다 기대하는 바가 있다. 바라는 바가 있다. 그런데 그것을 잊고 살 때가 너무 많다. 그릇을 준비한다는 것은 기대한다는 것이다. 그릇 자체는 의미가 없다. 그릇은 빈 공간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릇은 담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 곳에다가 무엇을 담아야 하는지 중요하다. 바울이 질그릇과 같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담았다고 한다. 그러면 실망하지 않는 다는 말이다. 빈 공간 안에 무엇을 채워야 할것인가? 물을 채우면 물그릇이고 밥을 채우면 밥그릇이고 보석을 채우면 보석 그릇이 되는 것이다. 우리 마음안에도 무엇을 채워야 하는가? 우리의 빈 마음에 혹은 빈 손위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득채워 지기를 바란다. 예수님으로 가득채워 지기를 바란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제일먼저 나아갈 때 기대하는 바를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예배를 드리러 올 때에도 기대하는 바를 가지고 와야 한다. 채워 지길 원합니다.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 뭔가 채워지지 않고 결핍되어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힘들다고 한다. 어렵다고 푸념하고 안된다고 말을 한다. 그리고 원망하고 비판하는 모습을 본다. 옆에 있는 사람도 짜증이 나고 힘들어 진다.
   당신 지금 소원이 뭐요 당신 마음속에 가득채워지길 원하는 기대가 뭐냐하고 질문을 하면 어물 거리면서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렇게 살면 안된다. 하나님 나는 이것 채워져야 합니다. 라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풍성한 기도 응답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빈 그릇,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 확실하게 재점검할 필요성이 있다.
   예수님께서 소경 바디메오를 고치실 때 그냥 고치신 게 아니다. 그냥 밝은 눈을 주신 게 아니다. 소경 바디메오는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눈먼 바디매오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신경을 썼을 것이다. 바디메오는 예수님이 여리고성을 지나갈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자기 인생을 예수님께 걸기로 결심하였다. 47절에서 바디메오는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른다. 그러자 예수님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눈을 떴다는 말씀이다.
   바디매오에게서 눈 뜨는 것이 우선순위였다. 바디메오 처럼 고래 고래 소리쳐야 한다.  부르짖는 것이다. 예수님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소경 바디메오는 이미 큰 그릇을 준비하고 있었다. 로마서 8장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많은 사람들은 내가 필요한 것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 대화를 나눠보고 일상생활을 보면 마땅히 빌 바를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자기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 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탄식함으로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간구하는 내용조차도 성령에게 의지하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3장의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가 구한 것은 동전 몇 닢 이었다. 진짜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3장 6절<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일으켜 세운다. 우리 삶 가운데 이런 것들이 필하다.
  복을 구하여 얻은 야베츠를 생각해 보라 ...그는 고통 속에 낳았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야베츠라고 불렀다. 그런데 자기 형제들보다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야베츠의 기도를 보면 “부디 저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그리고 제 영토를 넓혀 주십시오기도한다. 그는 자신의 삶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포기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영토를 넓혀 달라고 기도했다. 당신의 손길로 저를 도와 주십시오 재앙을 막아 주십시오 지극히 현실적인 기도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가 구하는 모든 것을 주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하나님이 주신 많은 기대 그 약속을 붙들고 간구하자. 더 무릎을 꿇고 기도하자. 내 생각 가지고 출발하지 말고 하나님의 생각을 가지고 출발을 하자. 그러면 내가 커진다.
    기도는 준비된 그릇을 채우는 능력이다. 무한대로 채워주신다. 무한 출력이 우리를 통해서 나갈 수 있다. 기도 할 때 문제를 풀게 해 주시고 기대를 채워주신다. 우리 인생을 너무 작게 제한하지 말자. 한 사람의 능력을 통해서 기도 없는 사람 천 명 만 명도 이길 수 있다. 기도의 능력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무한대인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3)아브라함은 지시하는 곳으로 갔다. 그곳은 3일 길이나 되는 모리아산 이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하게 지시할 곳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다. 반 순종 하면 안 된다. 온전한 순종이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아들을 준다는 약속을 15장에서 받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16장에 하갈을 취해서 이스마엘을 얻는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자녀이다. 이스마엘로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다. 네가 육체적인 힘을 가지고 이스마엘을 얻었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의 자녀는 아니다. 결국 반순종한 아브라함으로 인해서 엄청난 영향이 지금까지 미치지 않는가? 순종은 온전한 순종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다. 하나님이 이삭 대신에 수양 한 마리를 수풀에 걸리도록 준비하셨다는 말이다. 수풀에 걸렸다는 것은 내 노력 없이도 하나님이 다 준비시키셨다는 것이다. 수풀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것 잡으로 다니느라고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세심하게 신을 벗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사람에게 준비시킨다.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이해 할 수 없었다. 주실 땐 언제고 데려 가시다니 말도 안 되는 스토리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당황하는 믿음을 보여준다. 너의 아들, 네 사랑하는 아들을 하나님께 데려오라고 한다. 보통 아들이 아니다. 사랑하는 아들이다.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은 통제로 바치라는 것이다. 이삭에게 걸었던 모든 소망이 날아가는 순간이다. 진짜 아들 이삭을 바치면 하나님 앞에서는 믿음을 인정받을 수 있지만 가족 특히 사라에게는 이혼 당하고 아들 이삭에게는 정말 좋은 아버지는 아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다. 신을 벗고 순종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여행 차비를 한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산 까지의 거리는 48Km이다. 삼일을 걸었다. 하루에 16km의 길을 걸으며 그 고통과 갈등의 시간의 과정을 넘는다. 아버지가 아들을 바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칼을 들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네가 이제야 나를 경외하는 줄 아노라라고 말씀을 했다.
   그리고 창세기 22장 15절부터 18절까지 축복의 말씀을 주신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4)제 삼일에는 아브라함이 멀리 바라보았다. 결국 우리의 신앙생활은 장거리이다. 죽을 때 까지 믿는 신앙이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 목적지 까지 바라보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라보아야 할 땅은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 땅이다. 광야만 바라본 사람들은 넘어진다. 그리고 광야에서 죽는다. 그러나 가나안을 바라보는 자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
(5)행동하는 신앙이다. 진짜로 칼을 들어서 잡아 죽이려 했다. 하나님은 얼마나 다급하셨던지 아브라함의 이름을 두 번 부르면서 아브라함의 손을 저지 시키신다. 희망이 무너져도 아들이 번제로 드려져도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기를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한다.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내가 이제 알았다고 말을 한다.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을 붙잡았다. 시련 중에 지껄이고 울부짖고 변명하기 보다는 일체의 말을 지워버린다. 모리아산은 순종이 행동화된 공간이다. 하는 척 하지 않았다. 누가 보면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보지 않으면 하지 않으려고 한다. 입술로만 하지 않았다. 진짜로 움직였다. 산 위 정해진 곳에 올라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장작을 벌이고 있을 때 아브라함은 말이 없었다. 이삭을 제단에 올려놓고 손에 칼을 들고 이삭을 잡으려고 해도 말이 없었다. 바치지 않으면 하나님께 대해 실패하는 현장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을 위해서 일년 된 수양을 준비시켜 주셨다. 그리고 이삭은 다시 어미 사라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막 2:1-5의 이야기에 보면 중풍 병을 앓고 있었던 환자가 좋은 믿음의 친구들을 통하여 죄사함 뿐만 아니라 병고침을 받았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온다. 중풍병은 몸이 마비되어 못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것이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먹여줘야 되고 씻겨줘야 되고 대소변도 치워줘야 하는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병이라기보다는 장애이다.
   그 말씀에 보면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중풍병자의 친구들도 자기 친구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서 고치려고 데리고 왔지만 너무 많아서 예수님께로 다가갈 수 없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 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그냥 가거나 아니면 기다려 보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병을 고치고 간다. 방법을 찾는 것이다. 사람이 많아서 앞으로 가지 못하면 위로 가보겠다는 것이다. 지붕을 뜯어보자는 생각을 한 것이다. 지붕을 뜯으면 반드시 수리가 필요하다 그런데 친구의 병을 고치고 예수님을 만나려는데 돈은 그다지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라도 지붕 뜯고 들어가면 돈을 물어 주어야 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려고 하다가도 주춤 할 수 있다. 뭔가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무슨 소리를 하면 사람이 낙심을 한다. 그런데 좋은 믿음은 나도 나를 판단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판단에도 신경쓰지 말아라 나를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다. 네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열심을 다해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친구에 대한 사랑이 생각하게 만들고 대안을 만들고 지붕 뜯을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붕을 뜯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모두가 지붕을 뜯자는 말에 연합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장애물을 제거하는데 거침이 없어야 한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내 배 부르기 위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 생기면 도망치려고 한다. 그리고 절망하게 만들고 불평하게 만들고 무기력하게 만들고 부정적으로 만든다. 이제는 장애물이 있더라도 물러나지 말아야 한다. 전도 생활이나 기도 생활이나 예배 생활에 물러나지 말아야 한다. 예전에는 봉사도 잘하고 예전에는 기도도 잘하고 예전에는 뭐도 잘했는데 ...이런 이야기 하면 안 된다. 마치 이사야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는 심정이 우리가운데 있어야 한다. 여러분 우리가 분주한 일로 하루를 보내고 일주일을 보내고 한 달을 보내고 일 년을 보내지만 기억나는 것들이 없다면 나는 잘못 산 것이다. 방바닥에 등 붙일 겨를 없이 이곳 저곳 찾아 다녀야 한다. 행동하는 믿음 믿음은 행동하게 만든다. 움직이게 만든다. 얼마나 소란이 벌어졌겠는가? 흙이 떨어지고 지붕이 열리고 뭐가 내려오고... 예수님도 얼마나 놀랐겠는가. 예수님은 그걸 바라보시면서 친구들의 믿음을 본 것이다. 아이디어는 사람을 깊이 사랑하면 떠오르는 것. 아이디어가 잘 안 떠오르는 것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장벽이라고 생각되는 것 해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믿음은 해보는 것이다. 해보면 별 것 아니다. 뭐든지 어렵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다. 믿음은 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해보면 별거 아니다. 결국 들것에 메어가지고 왔던 이 중풍병자는 자신이 타고 왔던 그 들것을 들고 나가는 역사가 일어난다. 처음에 들것에 의지해서 갔을 때에는 이 들것을 자신이 가지고 나올지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은 일단 확신가지고 나가는 것이다. 다 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확신가지고 가는 것이다. 믿고 가는 것이다. 결혼이 뭔지 모르지만 가는 것이다. 옛날 어른들은 17살에 결혼을 했다. 그런데 모르고 가는데 살아보니까 알아지는 것이다. 우리 판단을 가지고 가지 말아야 한다. 내년도 모르고  가지고 확신가지고 간다. 다윗도 골리앗과 싸울 때 이길 확신가지고 나가는 것이다. 큰 칼앞에 주눅 들지 않았고 큰 키 앞에 주눅들지 않았다. 내가 해야 할 사역과 일에 대해서 주눅 들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나가고 믿음가지고 나가야 한다. 그래야 믿음의 성공자 축복자 간증자가 될 수 있다.





1. 창조의 하나님
성공은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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